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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비와 호지의 아빠 Sep 04. 2021

나는 '바담풍'하더라도 너는 꼭 '바람풍' 하거라

나는 옆걸음질 치더라도 너는 똑바로 걸어야 할텐데...

지난 월요일. 내가 재택근무할 순서가 된 김에 아이들 등굣길에 동행했다. 집에서 아이들 학교까지는 자동차로 약 10분. 수업은 8시 30분에 시작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델리 시내의 교통 체증을 피해 8시를 전후해서 등교한다.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집에 돌아와도 8시 30분까지는 충분히 돌아올 수 있는 거리이다. 아침 산책 대신에 아침 드라이브에 나선 셈 치고 차에 올랐다.


학교 앞에 도착했는데, 뒷자리에서 첫째 딸 호비가 수선스럽게 책가방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한다.


"아빠. 테스트 키트 안 가져왔어"

"잉?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오늘 아침에 검사했잖아. 어디에 넣어놨어?"

"분명히 넣었는데 없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미국계 국제학교. 12세 이상은 코로나 접종을 마무리한 미국계, 영국계, 이스라엘계 학생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학교이다 보니 지난 8월 둘째 주에 전면 개학을 단행했다. 접종을 받지 못한 나머지 아이들은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학교에서 나눠준 항체검사(Antigen Test) 키트를 이용해 검사를 한 후 그 검사 키트를 교문에서 제시해야만 학교에 등교할 수가 있다. 말하자면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라 할 수 있는데, 그 검사 키트를 못 찾겠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다 못해 살짝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 앞에서 이 옷 저 옷을 입어보며 부산을 떨던 첫째 녀석이 자기 방에 있는 공기청정기와 선풍기도 끄지 않고 집을 나설 때까지는 그래도 참아줄 만했는데, 테스크 키트를 안 가져왔다는 말에 나도 짜증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너는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놓고 다니는 거야?"


아이들을 등교시키기 위해 다른 집 차들도 계속 교문 앞에 몰려들고 있었다. 우리 차만 교문 앞에 주차시켜놓고 있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차를 움직여야만 했다. '학교에 못 들어가면 어쩌나? 다시 집에 가서 테스트 키트를 찾아와야 하나?' 찜찜한 마음에 집에 가지도 못하고 아이들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주춤거리고 있는데, 둘째 딸 호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언니가 교문 지키는 선생님한테 사정 설명 잘하고 학교에 잘 들어왔어. 걱정 마. 

선생님이 내일은 잊지 말고 테스트 키트 꼭 가져오라고 했어."




사실, 어린 시절 나의 건망증도 첫째 딸 호비보다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학교에 챙겨갈 준비물을 잊어먹는 것은 다반사였다. 시부모를 모시며 아침부터 맞벌이까지 해야 했던 어머니께서는 일찍부터 나에게 '네가 알아서 네 일을 챙겨야 한다'라고 가르치셨지만 소용이 없었다. 미술시간이나 음악시간에 필요한 단소, 피리, 물감이나 물통 같은 준비물을 까먹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숙제를 잊어먹는 바람에 아침에 일어나 초치기로 숙제를 하는 일도 많았다. 


"너는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놓고 다니는거니? 

너는 전쟁이 터져도 총을 깜빡하고 안 가져갈 녀석이다."


군대도 안 갔다 오신 어머니는 어디서 이렇게 찰떡같은 비유를 배워오셨는지 내가 뭔가를 깜빡깜빡할 때마다 항상 나를 혼내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넉살도 좋게 '에이. 전쟁 나면 총이야 챙기겠지.. 설마 그걸 안 챙기겠어요?'라고 되받아치곤 했다. 




나의 건망증을 꼭 빼닮은 첫째 녀석은 매일매일이 덜렁덜렁 투성이다. 아침마다 '내 핸드폰이 어디 있지?', '내 시계가  어디 있나?', '내 맥북 어디 있어?'를 외친다. 아내의 잔소리도 매일매일이 비슷하다. '호비야. 공기청정기랑 선풍기 끄라고 엄마가 얘기했어 안 했어?', '호비야, 도시락 챙겨야지.', '호비야 너 마스크 깜빡했잖아!!!'... 한바탕 소동이 끝나야 집을 나설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나 역시 어렸을 적 내가 어머니에게 들었던 꾸중을 내 자식에게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 


"너는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놓고 다니는 거야?" 


내가 아무리 옆걸음질 치더라도 내 자식은 똑바로 걸으면 좋겠는데... 내가 아무리 '바담풍' 하더라도 내 자식만큼은 '바람풍'이라고 똑바로 읽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참 내 뜻대로 안 된다. 다만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자기에게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당황하지 않고 나름 잘 해결해낸다는 것이다. 기억력은 좀 뒤떨어지게 타고났지만, 협상능력 내지는 상황 대처 능력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태어난 거 같아 다행이다. 아빠의 도움도 요청하지 않고 자기가 먼저 선생님에게 사정 설명하고 선생님을 설득해서 학교 교문을 통과했으니 말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이 방에 한번 들어가 봤다. 오늘도 호비의 방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어수선하다. 그 와중에 책상 위에 예쁘게 놓여있는 하얀색 테스트 키트... 차 안에서 '분명히 넣었어'라고 자신 있게 외치던 호비의 얼굴이 생각나 다시 한번 어이가 없어진다. 이제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등교를 서두르던 호비는 코로나 테스트까지는 마쳤지만 키트를 가방에 넣지 않고 책상 위에 고이 모셔놓고 학교로 간 것이었다. 그 테스트 키트가 말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좋아요?

건망증 많으신 주인님이 저를 잊어먹고 그냥 나가버리셨어요...

우리 주인님은 무사히 학교 교문을 통과하신 걸까요? 흑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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