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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도호도 Sep 04. 2022

제주 여행에서 만난 동행과 침묵의 식사를 하다

제주살이 18일차 2022년 8월 18일

갑작스럽게 휴무가 생겼다. 계획형 인간인 나는 돌발 상황에 당황하고 말았다.


'관광을 갈까? 아냐, 벌써 하루의 반나절이 지나버렸는 걸.'

'숙소에서 영화나 볼까? 아냐, 그건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외식이나 할까? 그렇게 먹어놓고 또 먹어? 그래, 이번엔 뭘 먹을까?(???)'


혼자선 먹을 수 없었던 음식들인 회와 고기가 생각났다. 마침 네이버 카페에 오늘 저녁 같이 먹자는 글이 있어서 댓글을 달았다. 답글이 안 달렸다. 또 다른 글이 있어 이번엔 작성자에게 채팅을 보냈다. 바로 답장이 왔다. 옳거니, 오늘 저녁은 흑돼지다!(탕탕탕)


나와 연락이 닿은 사람은 렌터카를 끌고 친히 내가 있는 곳까지 날 데리러 와주셨다. 감사해서 후식은 내가 산다고 밑밥을 깔아놓았다.(나,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 아니다.)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해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멀리서 속도를 줄이며 다가오는 차가 보였다. 이런, 한눈에 알아보았다. 나와는...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야...!


차에서 서로의 제주생활에 대해 간단한 이야기(할 말 없을 땐 날씨 이야기가 최고)를 나누며 고깃집에 도착하였다. 나는 침묵의 순간을 음미하지 못하는 성격인데 할 말이 통 생각이 나질 않아 불판만 쳐다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대화 주제를 쥐어짜 냈지만 나와 동행분은 나이도, 성별도, 하는 일도, 사는 곳도, 운전 여부도 모두 달랐다.


전에 요가원에 갔을 때, 요가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쉴 새 없이 많은 이야기가 오갔었다. 그리고 제주도 흑돼지구이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은 대화 주제가 되기에 부족했나 보다. 주문한 고기가 나오고 할 말이 없으니 입 안에 고기라도 들어차 있으라고 평소보다 천천히 고기를 먹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왔다.


내가 뱉어 놓고 모른 채 하긴 싫어서 후식을 먹을 거냐고 물었다. 동행분은 배불러서 괜찮다고 하였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겠지. 그렇게 나의 일일 흑돼지 동행은 날 데리러 와준 곳까지 데려다주시고 내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나와는 맞지 않지만 친절하신 분이었다.


흑돼지는 정말 정말 맛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혼자서 고기 2인분을 구워 먹었을 것이다. 기껏 며칠 만에 나가서 사람 만나고 왔는데 더 외로워져 버렸다. '역시 날 달래줄 건 아이스크림 밖에 없어...' 편의점에 들러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영화는 안 봤지만 대신 재미있는 책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일전에 혼자 돌아다니다 벤치에 앉아 떡과 우유로 점심을 먹은 적이 있다. 더 비싼 흑돼지를 먹으면서 이 순간을 그리워하게 될 줄이야.
아이스크림 퍼 먹으면서 책 읽는 게 가장 행복한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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