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 사진강의 노트 #3

결핍에 대한 사진이 갖는 책임에 대하여.

by Hodo Lee


가난과 피폐에 대한 묘사는 사진의 오래된 주제 중 하나로 여겨져 왔다. 거기에 더해 결핍, 장애, 박탈, 폭력 혹은 전쟁과 같은 여러 '그다지 눈을 돌리고 싶지 않은 것들'도 다큐멘터리 혹은 르포르타쥬라는 이름을 빌어 사진가가 사진이란 매체의 힘을 빌어 세상에 알려야 하는 무엇으로 여겨졌다. 나는 이런 계통의 것을 '결핍'에 대한 사진이라 부른다.


사진의 이런 사회적 접근에 대해서 제도권은, "저런 보기 싫은(무서운) 현실들은 우리에게 쉽게 보이지 않을 뿐, 분명히 현실 중 일부분이며 우리는 그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기에 그것들에게 접근하고 그것을 형상화하여 나눠야 한다."는 어느 정도 납득할만한 면죄부를 주었다.


하지만 그 잣대는 늘 미묘하게 작용하여 역사상 큰 논쟁이 생기기도 했다.

Kevin Carter | The vulture and the little girl, 1993. Original title: Struggling Girl.
Malcolm Browne | Burning Monk, 1963
Nick Ut | The terror of War, Napalm girl, 1972

이 세 사진중 가장 위, 케빈 카터의 사진은 아프리카의 기아 문제를 세상에 알렸다. 하지만 여러가지 개인 사정과, 사진을 찍은 전후 사정에 대한 몰이해와 비난에 의해 한계에 몰린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프리카의 기아는 끝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이미지화 되지 않았으며, 저 불멸의 사진 이후의 에피소드로 남는다. 아래의 사진은 베트남 응오딘지엠 정권의 탄압에 대한 틱꽝득 승려의 소신공양 사진이다. 하지만 결국 베트남전은 발발하고 만다. 미국이 독주시대에 타국정권에 대해 펼치던 간섭과 전쟁의 내막 같은것은 저 먼 이야기가 된다. 마지막 사진은 베트남전에 대한 세계의 의견을 송두리채 바꿔버리고 종전을 앞당긴 역사적 사진이 되었다. 어째서 틱꽝득의 소신공양을 말리지 않았는가라는 비난은 나오지 않았다. 사진이 찍힌 후 소녀는 군인들에게 구해졌다. 피상적인 논쟁이 있을수도 있고, 그런 논쟁따위 완전히 무의미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위의 사진들을 볼 때, 우리는 예술사, 사진사적 논쟁처럼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논쟁을 일으키는 핵심은 우리의 일상 코 앞까지 쉽게 끌려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논쟁은 사진을 찍은 사진가의 태도에 대한 간단한 물음으로 치환된다.


"당신은 [그런] 사진을 왜 찍었습니까?"


이것이 매우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이유는 이 질문이 "가난과 피폐를 찍은 이유는, 당신이 그것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고, 단지 그것이 시각적으로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입니까?"로 바뀌어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촬영자의 의도를 묻는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질문에 당당히 맞서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기 위해서는 사진을 찍은 사람이 단순한 '시각적 강렬함'이 아닌 다른 여러 의미에 대해 스스로 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우린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된다. 어째서, 결핍을 묘사한 사진에 대해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고 그 의미에 대해 질문하게 되는 걸까?


나는 그것이 사진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가난과 피폐 그리고 결핍에 대해 충격적일 만큼 빠르고 쉽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것을 묘사하고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매체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19세기 이전 회화들 중, 가난과 피폐가 직접적으로 묘사된 경우를 찾는 것은 그렇게 녹록한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회화 자체가 사진에 비해 매우 불투명한(정보를 객관적으로 전달함에 있어) 매체이기 때문이다. 회화는 화가의 인식과 재구성에 의해 만들어진다. 때문에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참혹(결핍)함에 대한 묘사를 화가가 (혹은 화가에게 일을 주는 권력자들이) 널리 퍼뜨릴 이유가 딱히 없었다. 복제와 확산이 힘든 당시의 기술적 한계 때문에라도 또한 경제적인 이유 때문으로도 그렇게 [결핍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회화를 빌어 퍼져 나갈 일이 일어나긴 애초에 힘들었던 것이다.


Pieter Brueghel | Beggars, 1568 / 거지들에 대한 묘사라 해도 이것이 사진과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Gainsborough Dupont | Charity Relieving Distress, 1784
Willam Hogarth | Gin Lane, 1751

위의 그림들을 보면 알 수 있듯(혹은 19세기 이전 가난을 묘사한 회화들-로 자료를 찾아보면), 19세기 이전 '결핍'이 회화로 묘사되는 횟수는 많지 않았으며, 그것이 회화였기에, 사진에 비해 그 묘사의 방향성은 상대적으로 덜 투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드디어, 19세기를 전후하여 하나의 분파로 여겨지게 된 사회적 리얼리즘(Social Realism) 회화가 시대적인 요구에 반응해 발생했다. 이 이 시기에 발생한 이 예술사조가 사회의 산업구조화, 계급의 발생, 사회제도적 변화(민주주의 대두)등의 현상들이 맞물려 일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Luke Fildes | Applicants For Admission To A Casual, 1874

대표적인 사회적 리얼리즘 화가 중 하나로 영국의 루크 필즈(Luke Fildes)가 있다. 그가 1874년에 그린 Applicants For Admission To A Casual은 그를 단번에 사회의 주목할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그는 그의 회화를 통해 가난과 결핍에 대해 묘사해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이때, 이 그림에 대해 누군가가 "이 그림은 왜 그렸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루크 필즈는 분명 "내가 보여주는 이미지의 힘으로 사회의 계급적 불평등과 가난, 불의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할 것이고, 우리는 그것에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확고한 생각과 주장을 바탕하고 있지 않다면, '굳이' 혹은 '그냥', '어쩌다 보니' 그런 결핍에 대한 묘사를 그림으로 하지 않았을 것이리라고 우리가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 사진사적으로 회화의 사회적 리얼리즘과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때 언급되는 사진가로는 루이스 하인(Lewis Hine)과 제이콥 리즈(Jacob Riis)가 유명하다.


Jacob Riis | Children sleeping in Mulberry Street, 1890
Lewis Hine | Cotton Mill Girl, 1908

이 시기에 대한 사진사를 보면 우리는 루이스 하인과 제이콥 리즈에 대한 평가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가는 제이콥 리즈의 사진은 너무 선정적이고 피사체에 대한 경멸의 시각조차 느껴진다고 평한다. 반면 루이스 하인의 이미지의 경우 피사체들의 인간적 품위를 지켜주고 있다고 표현한다. 이런 평가는 사진의 이미지에 대한 너무 편파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라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 하기 힘든 분명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제이콥 리즈와 루이스 하인이라는 인간 개인으로서의 태도는 사진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기록으로 남아 평가의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제이콥 리즈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민자들을 비하하는 표현을 사용한 것과 루이스 하인이 국립아동노동위원회를 위해 사진을 찍는 동안 그가 아이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에 대해 회고한 내용을 비교해 본다면, 어떤 사가들 왜 저런 평가를 내렸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물론 각 사가들의 생각은 다르기 마련이며 이런 평가를 떠나 이들의 사진들이 충분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위에 언급된 제이크 필즈의 회화 그리고 제이콥 리즈와 루이스 하인의 사진에 대한 평가를 눈여겨보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은, 사진이 가진 빠른 속도와 즉발성 때문에 사진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에 대한 의미와 평가가 회화와는 조금 다르게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얘기하는 사진의 빠른 속도와 즉발성은 사진이란 매체를 사용하는데 필요한 총체적 시간의 양에 대한 이야기다.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것이다.


제이크 필즈와 같이 회화로 결핍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림을 그리는 자신이 그 묘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필요하다. 하지만 제이콥 리즈나 루이스 하인처럼 결핍의 현상을 사진으로 묘사하는 데에는 (극단적으로 말해) 내가 현상 앞에 서서 셔터를 누르는 순간만큼의 시간만 있으면 충분하다.(여기서 필즈나 리즈 그리고 하인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잠깐 미뤄 두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사진이란 매체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이 속도와, 그 속도에서 오는 가벼움의 함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사진이 만들어지는 저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그리고 편리함)에 의해, 사진에 들러붙을 수밖에 없는

사진만의 속성이 있다. 내가 의도컨 의도하지 않았건, 아니면 그 어떤 깊은 생각이 있건 없건간의 어떤 현상은 찰나에 의해 새겨지고,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 그 속성을 "어쩌다 보니"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자.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면 어째서 결핍에 대한 사진에 대해 그 사진이 만들어진 이유를 많은 사람들이 묻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결핍을 묘사하는 사진들에 대해 묻는 이유는, 결핍에 대한 사진이 주는 시각적이고 감성적인 충격이 너무나 크기에, 그것이 그저 '어쩌다가' 찍힌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가 사진이란 매체를 통해 결핍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고 한다면, 그 무게의 근원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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