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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열무호두 Feb 21. 2021

일요일 저녁의 비건 식빵.

빵을 만들다가 우연히 얻은 마음의 평화

일요일 저녁.

남편은 회사 동료들과 자전거를 타러갔다. 나는 가벼운 두통 때문에 침대와 한 몸이 된 채 식빵이 발효되는 것을 기다린다. 빵틀에서 일센티 조금 못되게 올라오면 오븐에 넣어야 한다. 오븐을 예열하고 먼저 뜨거운 물에 씻은 호두를 굽고 있다.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한다. 나는 빵을 먹는 것보다 굽는 것에 맛이 들렸다. 밀가루를 반죽하는 것에 탐닉한다. 밀가루와 물, 이스트, 약간의 설탕과 소금을 넣고 15분간 놓아두면 힘이 없고 끈적하던 밀가루 반죽은 힘이 생기고 쫀쫀해진다. 그 반죽에 두유와 코코넛 오일로 만든 비건 버터를 넣고  치대고 또 치댄다. 손에 달라붙던 반죽은 아기 엉덩이처럼 탱탱해진다. 아기 엉덩이를 만져본 적이 백만년도 더 된 것 같지만. 


그리고는 그 반죽이 두 세배 부풀어오르기를 기다린다. 반죽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을 때 자국이 남아 있으면 적당히 발효가 된 것이다. 그 반죽을 두개로 나눠서 둥글게 성형한다음 15분을 기다렸다가 제대로 모양을 잡아준다. 돌돌 마는 것. 이걸 잘해야 식빵의 단면에  미세한 회오리 모양이 나오고 예뻐진다. 그 과정이 너무 좋다. 사진을 찍어놓지 않아 아쉽지만.


몇 주전, 가족의 일로 머리가 아파서 며칠을 고생한 적이 있었다. 화가 나고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밀가루 반죽을 성형하다보니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완전히 다른 일에 몰입하자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왜 별 것도 아닌 일에 내가 이렇게 화를 내고 있지? 그러자 머릿속이 맑아지고 행복감이 밀려왔다. 아 괴로워할 필요 없는 거였는데... 빵을 만들다가 갑작스레 닥친 깨달음이라니. 그 이후로는 괴로운 일이 생기면 빵을 만든다. 먹고자하는 마음보다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강하다. 이미 냉동실엔 다 먹지 못한 빵들이 넘쳐나는데 계속 만들고 싶다. 그 때 만든 모닝빵은 작업실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었다.


요 탱탱하고 예쁜 녀석들. 오늘도 빵을 더 만들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이미 오븐에는  식빵이 구워지고 있는 것이다.


근데 왜 갑자기 빵을 만들다가 그런 깨달음과 행복감이 밀려오게 된 것일까? 우울증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슬픈 나날이었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내가 고민하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희열은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다른 일에 몰입함으로써 나 자신과 떨어져서 바라보게 된 것일까? 예쁘게 나온 반죽을 만지면서 웃고 있다가 퍼뜩 든 생각 하나에 마음이 천국이 되다니. 나의 마음은 참 널뛰기를 잘하는 녀석인가보다. 알고보니 내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본질이 그렇다고 한다.

어쨌든 그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우울하거나 내 본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나는 밀가루 반죽을 치댄다. 그러다보면 온 몸에 피가 돌면서 힘이 난다. 코로나 덕분에 시작하게 된 홈베이킹 덕분에 좋은 마음 수행 도구가 하나 생긴 느낌이다. 냉동실에는 이제 더 이상 빵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게다가 파는 것처럼 예쁘지도 않지만 맛은 괜찮다.


중간 중간 기포가 보여서 혹이 난 것 같은 식빵.

식은 후에 잘라보았다. 단면은 나쁘지 않다.

방금 구운 식빵. 한 덩어리가 삐죽 솟았다. 뿅망치로 맞아서 혹이 난 거니? 그러면 어떠랴. 나는 유튜브로 빵을 배운 일개 비건 홈베이커인 것을. 게다가 우유와 버터가 든 레시피를 내 맘대로  두유와 비건 버터를 넣어 만들지 않는가.


 결과물이 매끈하지 않아도 슬퍼하지 않기로 한다. 한 번 더 만들고 싶은 마음을 누른다. 만드는 과정에서 이미 큰 기쁨을 주었으니. 집안에는 고소한 빵냄새가 진동하고 오븐앞을 왔다갔다 하다보니 어느새 두통도 사라졌다. 내 본업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자!오늘은 빵냄새를 맡으며 푹 자고 내일은 이 빵으로 샌드위치를 싸들고 일터로 나갈 것이다. 여러분들 모두 좋은 일요일 저녁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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