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은 왜 가치가 있는가?
살다 보면 우리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들과 현실이 다를 때가 있다. 이것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물이나 사건의 목적이나 이성적 당연함과 현실의 차이이다. 우리는 이것에서 괴리감을 느낀다. 사물의 경우를 예를 들면 야구 경기를 하기 위해 사용되던 배트가 사람을 구타하는 경우, 회를 썰기 위한 칼이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 등등이 있다(예가 너무 잔인한가...?). 그런가 하면 사건 또한 현실에서는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이성적인 목적과는 다른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한다는 이성적 목적과는 다르게 아이를 학대한다든지(창녕 9살 소녀 사건), 코치와 팀 닥터는 선수의 기량 발전을 신경 쓸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선수를 구타하고 괴롭혀서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든지(故 최숙현 선수 사건). 이처럼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하나라고 알고 있지만, 의미는 시간이나, 환경, 사건 등에 따라 현실에서는 다른 의미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것은 사물이나 사건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어떠한 문장이나 관념들도 현실에서는 다른 것으로 보일 때가 많다.
왜 우리는 현실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들임에도, 특정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당연히 00일 것이다'라는 이성적 목적을 가지고 있을까? 그것은 일상적 언어가 가진 특성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부모님, 친구들, 미디어에 의해 언어를 배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대상의 도형적인 연관성이나 의의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그 언어를 알려준 사람의 언어를 똑같이 따라 할 뿐이다. 예를 들어 겉옷을 벗기면, 반짝이는 검은 머리와 하얀 속살이 드러나고, 볼록한 가슴을 지나 아래쪽은 검은색으로 뒤덮인 구멍이 있는 존재를 만났다고 생각해보자. "엄마, 이게 뭐야?" "응 그건 모나미 펜이야. 모. 나. 미. 펜!" (참고: 언어의 자의성 https://brunch.co.kr/@hogeunyum/179)
하지만 이러한 일상적 언어가 현실에서 다르게 표현될 때, 우리는 그것을 시적이라 말한다. 이것은 이성적인 것과는 반대의 것들이다. 시는 당연하다고 생각지 않는 것들을 표현한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문장이 말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마음이라는 단어가 가진 일상적 의미와 호수가 가진 일상적 의미는 다르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면 우리는 유쾌함을 느끼고 원래 알고 있던 의미 이외의 다양한 의미를 상상하게 된다. 또한 시적 요소가 있는 문장은 단순히 하나의 의미로 해석되지 않고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내 마음은 호수라는 표현을 듣고 마음이 잔잔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호수에 빠져 죽은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쓸쓸해질 수도 있고, 서핑을 즐기는 호수를 생각하면 마음이 즐겁고 흥분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앞의 상황들을 고려해본다면 이성적인 것보다 시적인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단어나 사건들이 한 가지의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깨닫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 화가가 있다. 그가 바로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다.
고대 서양에서 그림은 사물이나 사건의 재현이 목적이었다. 그들은 대상을 최대한 비슷하게 그리거나, 구전으로 전해지는 신화 등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와 관람자에게 전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 사물이나 사건을 얼마만큼 똑같이 구현했느냐이다. 그것을 똑같이 구현하지 못하면 예술가는 사기꾼이나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참고: 플라톤 랩소드를 싫어했던 이유 https://brunch.co.kr/@hogeunyum/60). 이것은 중세에도 마찬가지이다. 중세에는 특히나 종교화가 많이 그려졌는데, 이 그림들은 성서의 이야기를 얼마나 잘 재현해냈느냐가 중요한 과제였다. 하지만 고대와 중세를 지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그림은 단순한 재현에 그치지 않는다. 화가들은 그림 안에 자신의 뜻을 은폐해서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도가 시작된 대표적인 작품이 자크 루이의 <마라의 죽음>이다.
이 그림은 살해된 프랑스의 혁명가인 장 폴 마라를 그린 작품이다. 피부염으로 인해 유황이 섞인 욕조에서 목욕을 하던 마라는 다른 정치 노선의 당원인 샤를로테 코르데에 의해 욕조 안에 있는 채로 살해당한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라가 살해당했다고 보기에는 피부가 너무 깨끗하고, 저항의 흔적이 전혀 없다. 그리고 그의 자세는 꼭 십자가 강하나 피에타에 나오는 예수의 자세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단순히 마라의 죽음을 재현해내는 것이 아니라, 마라를 '혁명의 순교자'로 표현하고자 하는 자크 루이의 사상이 담긴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캔버스는 대상이나 사건의 재현의 장이 아닌, 화가들의 사상이 드러나고 표현하는 장이 되었다. 그것이 정점에 오르게 된 것은 바로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서이다.
그중에서도 선구자의 역할을 했던 이가 바로 이탈리아의 조르조 데 키리코이다. 그는 현실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상황에 대상들을 나열하는가 하면, 대상을 왜곡시킴으로써 이성적인 그림에서 벗어난다. 이를 보고 그동안 전통 회화들을 그리던 르네 마그리트는 적잖이 충격을 받는다. 미술뿐만 아니라 철학, 사회학,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마그리트는 재현적 그림은 단순한 이성적 언어를 전달하는 기능에 그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는 대상의 재현이 아닌 시로써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나의 그림을 상징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작품의 진정한 본질을 무시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물건을 사용할 때는 그 물건 속에서 상징적 의도를 찾지 않지만, 그림을 볼 때는 그 용도를 찾을 수 없고 회화를 접하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의미를 찾게 된다… 상징적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본질적인 시적 요소와 이미지의 신비함을 간과하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신비함을 감지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떨쳐 버리고 싶어 할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물음으로써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만약 신비함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다른 반응을 할 것이다. 다른 것을 묻게 될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 (수지 개블릭, 『르네 마그리트』, 시공사. 2000, 11쪽)
자 이제, 마그리트가 어떻게 그림으로 시를 썼는지 살펴보자. 첫 번째로 마그리트의 그림은 역설적이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의 초현실 상황은 대상의 형태를 왜곡했던 다른 초현실주의자들의 그림들과는 조금 다르다. 그는 명확하게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상들의 역설적인 상황을 통해 이루어진다. 수지 개블릭은 그의 책에서 마그리트는 ① 고립 , ② 변형, ③ 잡종, ④ 규모의 변화, ⑤ 우연한 만남의 유발, ⑥ 이중 영상, ⑦ 모순, ⑧ 개념적인 양극성 등 8가지의 역설적인 상황을 통해 관람자로 하여금 상상력을 자극시켰다고 평가한다.
“우리는 말과 대상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세운, 통상 일상적인 삶에서는 무시되어 온 말과 대상의 어떤 성격들을 정확히 부각할 수 있다.”
- 르네 마그리트- (미셸 푸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고려대학교 출판부, 2010, 52쪽)
두 번째로 마그리트는 그림에서 문자를 이미지화 함으로써 시적 요소를 가미한다. 마그리트 이전의 그림 중에 그림 안에 문자가 있는 경우 그것은 그림을 설명하거나, 아니면 그림의 성격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마그리트는 그림 안에서 더 이상 문자가 그림의 종속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닌, 독자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만든다. 그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이미지의 배반>을 한 번 살펴보자.
마그리트는 현실에서 충분히 볼 법한 파이프 그림을 그리고 그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씨를 적어놓는다. 이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① ‘이것(이 그림)’은 캔버스 위에 그려진 그림이지 파이프가 아니다. ② 위의 그림은 파이프가 아니다 ③ ’ 이것’이라는 말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다 보면 관람자는 밑에 써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자가 이미지를 해석하는 역할에서 벗어났음을 깨닫게 된다. 문자는 이미지와는 별 상관없이 붙여진다는 '언어의 자의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꿈의 열쇠>에서는 언어의 자의성이 무엇보다도 크게 드러난다. 마그리트는 단어와 사물의 관계 또는 언어 표현 체계와 그림 표현 체계 간의 관계에 관한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전혀 상관없는 네 종류의 사물들이 한 구획 안에 있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고 이미지들은 어린이의 그림책처럼 명칭이 붙어 있다. 그러나 세 가지는 명칭이 틀리게 명명되어 있다. 마그리트는 일상적인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인간의 심리를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제작했다. 언어 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물의 양상은 그것의 단순함과 익숙함 때문에 숨겨져 있다(우리는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한다-항상 우리 눈 앞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관람자는 제대로 명칭이 명명된 그림은 넘기고, 제대로 명명되지 않은 세 사물에서 그림의 의미를 찾아내려 애쓴다. 르네 마그리트는 인간이 아무 의심 없이 사용하는 언어 사용에는 사고가 없다고 판단한다. 언어 자체가 사고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파괴하기 위해 그는 상관이 없는 언어와 이미지를 한 프레임 안에 둠으로써 관람자에게 이미지와 언어의 관계를 사고를 강요한다. 마그리트의 회화에서 드러난 상관없는 이미지와 언어의 병치는 이미지가 언어에 속하거나, 언어가 이미지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지와 언어는 각각 독립적인 것이다. 대상의 순수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미지를 언어에서 독립시켜야 한다. 언어는 자의성을 가지고 있기에 대상과 전혀 상관없이도 이름이 될 수 있다. 마그리트의 깨어진 칼리 그램은 인간들이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언어의 관습을 지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마그리트는 제목마저 시적으로 변형시켜서 언어가 단순히 그림을 재현하거나 아니면 그림이 재현해야 하는 것을 거부한다. 미술 작품에 있어서 제목은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 작품보다 작품 자체와 훨씬 강한 수사학적 관련성을 지니고 있고,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도구이다. 우리는 단번에 이해할 수 없는 현대 미술 작품을 볼 때 제목으로써 그것을 해석하려고 한다. 미술 작품의 제목은 보이는 이미지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정형화된 ‘이미지의 재현’이자 반대로 이미지가 재현해야 할 것들이었다. 그러나 마그리트는 이것을 거부한다. 그의 작품에서 그림과 제목 사이는 아주 복잡하고 아주 우연적인 관계이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제목은 그림을 보충하는 일을 하는 대신, 제목과 그림 사이의 괴리만을 강조할 뿐이다. 그는 이를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황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다시 한 번 마그리트 그림들의 제목을 살펴보자)
“제목들은, 사유의 자동성이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내 그림들을 불가피하게 친숙한 지점에 위치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선택된다.”
-르네 마그리트-
이처럼 마그리트가 그림으로 시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르네 마그리트는 이성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현실에서는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았던 세대이다. 그중에서도 전쟁은 이성적으로는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라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끔찍하게 참혹했던 사건이었다. 애국심이나 충성심, 가족들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고귀하고 순결한 이성적 정의를 가지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총을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막상 전쟁터에서 마주한 것은 자신들과 똑같은 명분을 가진, 잘못 없는 타국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데로 전쟁의 결과는 수 없이 많은 사상자와 폐허가 된 삶의 터전뿐이었다. 이성에 의해 집단적인 포퓰리즘이 형성되고, 인간들을 존재가 아닌 도구로 생각하게 되는 사회를 바라보며 마그리트는 무엇이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인지했다.
사유 없인 받아들인 언어는 사상이 되고, 그 사상은 현실에서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사유 없는 사상을 고발한다. 나치당의 당원이었던 아이히만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학살하는 역할을 받아 충실히 수행한다. 그는 전쟁 후에 연합군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는다. 그는 스스로를 무죄라고 주장하며, 자신은 단지 나라와 당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정신감정 결과 누구보다도 정상적인 정신을 소유한 자였다. 그는 당시 독일의 지식인들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아이히만은 그것을 지극히 이성적인 사상이라 믿었지만, 현실에서 그의 행동은 400여만 명의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이성이라고 하는 거대한 권력에 묶여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지는 않는가?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이성적인 것들은 무엇이 있는가?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많은 수입을 얻는 사람을 성공의 척도로 삼는다. 혹시 그러한 선입견들 때문에 당신은 스스로를 부족한 사람이라고 자책하거나, 아니면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 자위하지는 않는가? 그리고 그 기준에 맞춰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며 그 사람들을 비하하거나 동경하지는 않는가?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던 그 말들은 스스로의 존재 자체로, 또는 다른 사람들을 존재 자체로 사랑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이제 마그리트가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당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이성적 언어에 가두지 말아라. 당신은 이성적인 단일 의미로 정의할 수 없는 시적 존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