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그린 뒤뷔페의 그림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비례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여성의 모습, 굉장히 과장된 신체 비율, 크게 확대된 성기의 모습, 잘 그린 그림이라기보다는 못 그려서 추하게 보이는 이 그림들. 프랑스 교과서 1순위에 실릴 정도로 인기 있는 작가 장 뒤뷔페의 작품입니다. 이 그림들은 일반적인 아크릴이나 유화가 아닌, 쓰레기나 폐기물을 섞은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인데요.
모습뿐 아니라 재료에까지, 이렇게 기괴하고 상식을 벗어나는 그림들이 어떻게 전 세계적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을까요? 그리고 이런 추하게 보이는 작품들은 우리 삶에 어떤 도움이 될까요? 오늘은 아도르노 철학으로 뒤뷔페의 그림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정부였던 비시 정권은 약 4년간 독일 나치 괴뢰정권에 프랑스 점령을 허용합니다. 이 시기 비시정권은 많은 레지스탕스를 체포하고 고발했으며, 나치당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등, 친 나치 정권이 됩니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친일파와 같은 모습이었죠.
그러던 중 1944년 8월 프랑스가 해방전쟁에서 승리하고 연합군이 파리로 입성합니다. 그러자 레지스탕스를 중심으로 한 비시정권과 친 나치 세력의 숙청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이 숙청의 대상 98% 이상이 여성이었다는 점입니다.
레지스탕스들은 나치에 부역한 자들을 처단한다는 명목 하에 독일인과 애정 관계에 있거나 사창가에서 일하던 여인들을 거리로 끌고 나와 삭발을 하는 야만적인 처형식을 거행합니다.
여인들은 삭발당한 채, 거리를 끌려 다니며 군중들에게 모욕과 구타를 당했습니다.
레지스탕스가 노린 것은 대중을 향한 공포와 친 나치 차들에게 자신들의 우월함을 보이려는 것이었습니다.
잊고 싶은 수치스러운 기억들을 여성이라는 약자에 대한 성차별적 폭력과 광기로 다시 드러낸 비정상적인 현상이었죠 이 처형식은 드골 정부가 세워지고, 공식적으로 과거사 청산 재판을 시작할 때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에게는 처벌이 필요하다'라는 이성적인 관념이 타자를 향한 폭력과 광기로 변해버린 이 사건에 수많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경악하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가 행했던 광기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모두가 잘 알듯이 2차 세계대전은 나치의 아리아인 우수 혈통 지키기를 실현시키기 위해, 유대인, 집시, 장애인, 종교를 탄압하고, 다른 국가들을 점령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그들은 여러 과학적 연구결과들을 통해 아리아인들이 가장 우월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세계 진보를 위해서는 이 아리아인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이었죠.
이 이성적 이론을 이루기 위해 그들은 타자를 도구화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의 이성적 이론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은 제거해도 되는 존재로 여기게 된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과 집시, 장애인들을 잡아서 죽입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의 피해 국가였던 프랑스에서도, 전쟁이 끝난 후 '친나치파를 처단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운다'는 자신들의 이성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타자를 도구화하고 폭력을 행하는 모습이 그대로 재현된 것입니다. 문제는 독일의 나치즘이 아니었습니다. 이성이 최고다라고 여기는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이에 유럽의 지식인, 예술가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이성적인 최고 가치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이성적 최고 가치는 인간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가?"
뒤뷔페의 상식을 벗어나는 그림들은 바로 이 물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조형미, 비례미 등 기존 예술에서 요구하는 아름다움을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구상과 추상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장인의 회화 실력도 부정합니다.
쾌를 주는 절대적 미가 있어야 한다는 기존의 미학도 파괴합니다. 그의 그림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물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 때문에 그의 작품은 이전의 예술형식으로 바라보면 굉장히 추한 그림입니다.
이성이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던 사회처럼 예술계에서도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뒤뷔페는 그것에 저항하는 작품을 만들고, 새로운 창조 방법들을 제시한 것이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아도르노의 예술론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줄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도르노는 예술은 단순히 우리의 삶과 전혀 관계없는 저 먼 세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예술은 현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다뤄야만 하고, 추한 것이라 여기던 것을 주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추한 것은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술은 현 사회보다 더 나은 가상의 모습을 제시하고, 이것을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더 나은 존재를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인간은 이렇게 받아들이기 불편한 추의 예술을 통해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예술론에서 비춰보면 뒤뷔페의 작품들은 우리로 하여금 당연한 이성적 생각들에 질문을 던져보고, 한 편으로는 더 나은 삶을 생각해보게끔 만듭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나요? 아마도 각자는 스스로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어느 정도는 규정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성적으로 너무 당연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겠죠. 그래서 당연한 나의 모습이 아닐 때, 스스로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타자를 대할 때도 당연한 것을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거기서 불편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연한 것은 어디로부터 왔나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나이에 맞는, 성별에 맞는, 장소에 맞는, 전공에 맞는, 학벌에 맞는 역할들은 정말 당신의 내면으로부터 온 건가요? 아니면 미디어, 부모님, SNS, 타인의 눈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가요? 그리고 그 당연한 이성적 기준에 안 맞아서 불편하게 만드는 자신 혹은 타자를 폭력적으로 몰아세운 적은 없나요? 우리는 이성이 광기가 되지 않도록 현실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더 나은 모습을 꿈꿔야 합니다.
정리를 좀 해보겠습니다. 이성이 광기가 되면, 타자를 도구로 인식하고 폭력이 발생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이성은 반드시 비판되고 이성보다 더 나은 것을 찾아야 합니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경험은 예술을 통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술은 이성에 있어 추하고 불편한 모습들을 주제로 삼습니다. 그것들은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을 제시합니다.
전통적 예술세계의 기준을 비판하고, 저항했던 장 뒤뷔페의 작품은 우리가 그 경험들을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는 뒤뷔페의 그림을 통해 이성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가상으로의 모방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성에 불편한 것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술은 스스로와 타자를 도구로 바라보지 않고, 존중하며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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