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신작#종읙기원#악의탄생
주인공(한유진)이 잠에서 깼다. 머리카락에 찐득한 무엇이 엉겨 붙어있다. 무슨일인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피를 뒤집어쓴 본인의 모습이 보인다. 주변으로 눈을 가져가자 방 안이 온통 붉은 피로 가득하다. 황급히 놀라 문을 연다.
계단은 피범벅이 되었있다. 일층에는 엄마가 죽어있다. 엄마의 목에는 면도칼에 베인 상처가 있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도 없고 도망친 흔적도 없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지? 하나씩 기억을 더듬는다. 그렇다.... 내가 엄마를 죽였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것만 같은, 일어나서도 안되는 사건이 정유정의 신작소설 「종의 기원」의 시작이다.
"책 소개를 한다더니 범죄 스릴러의 범인을 말하면 어쩌자는거야!"
"장동건 류승룡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이 되는 「7년의 밤」"
이것은 스포일러가 아니다. 3페이지만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정유정은 그녀의 전작인 「7년의 밤」에서와 마찬가지로 (누가 피의자이고 피해자라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소설의 시작에서 벌써 범인을 밝힌다. 그리고 그 범인의 기억 복기를 통하여 소설을 이끌어 나간다.
소설의 주인공은 살인이 현재부터 과거까지의 기억을 통하여 자신이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는지를 서술한다. 그리고 왜 살인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스스로 타당성을 부여하기 시작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일명 최순실 게이트라고 불려지는 사건으로 인하여 상실감과 역겨움으로 가득차 있다.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수많은 재물을 모으고, 부정부패를 저질러온 인물은 무력함을 준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바라보며 떠올리는 영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부자들"이다.
이 영화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하지만 일어날법한 사건을 그렸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쾌하게 해결해줌으로서 관객들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 카타르시스가 이 영화를 흥행으로 이끌었다. 내부자들 말고도, '올드보이', '공공의 적', '밀정', '터널'등이 카타르시스를 주는 대표적인 영화이다.
카타르시스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나 대신 누군가가 내 욕망을 대신 실현하고 해소해준다눈 의미로 사용한다.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6장에서 시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인들이 비극을 통하여 카타르시스를 준다고 말한다. 비극 속에서 시인들은 끔찍하고 잔인한것을 노래하고 묘사한다. 직접 보면 괴롭지만, 그것을 관람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에는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되고 이것들이 극 중에서 해소 될 때, 관객들은 만족을 느끼고 이 비극을 아름답게 느낀다는것이 카타르시스이다.
정유정의 소설은 카타르시스 그 자체이다. 범인의 시선으로 범죄를 저지를 때의 심리묘사와 그에 대한 개인적인 정당성들은 독자로 하여금 범인에게 당신의 욕망을 전이하고, 범죄자를 연민하게 만든다. 일어나서는 안될 일들, 내가 할수 없는 일들, 하지만 한번은 누구나 머릿속에서 그렸던 일들, 일어날 당위성을 가진 일이 내 손이 아닌 극 중의 주인공의 손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 대리만족을 느끼게 한다. 설령 그것이 '악'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점에서 그녀의 소설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닮아 있다. 상식과 사회 도덕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범죄가 범죄자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것이 이해되고 그를 연민하게 되는 기이한 상황. 물론 논하고자 하는 바가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이방인」 속 뫼르소와 「종의 기원」 속의 한유진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럴 법도 하구나 싶어진다.
이 책의 장점은 디테일, 속도감 그리고 기호학이다.정유정 작가는 발로 글을 쓰는 작가로 유명하다. 소설의 배경, 사건의 전개를 위하여 그녀는 직접 취재를 한다. 그 취재의 깊이가 상당히 깊어, 소설을 읽고 있으면 마치 실제 사건이 눈 앞에 펼쳐지는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녀의 소설에는 디테일이 살아있다.
한밤의 방조제가 늘 그렇듯,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횡단보도 옆 노점. '용이네 호떡집'도 문을 닫았다. 방조제 아래 나루터는 어둠에 파묻혀 있었고, 활주로에 가까운 6차선 차도는 짙은 안개가 집어삼켰다. 바닷가 도시의 겨울밤답게 바람이 거칠고 매서웠다. (p.18)
두번째는 속도감이다. 그녀의 소설은 쉽게 읽히며, 호흡이 굉장히 빠르다. 분명 탈고 전, 퇴고를 하며 수없이 읽었을테니 이는 분명 작가가 의도한 호흡일 것이다. 빠른 호흡은 범죄 스릴러에 긴장감을 주고 독자가 다음 페이지를 기대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녀는 이 부분에서 탁월함을 보여준다.
한발짝, 여자의 종아리 옆으로 다가섰다. 원피스 자락이 덮여 있는 허벅지 옆으로 다시 한 발짝, 팔꿈치 옆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치켜든 여자의 목이 턱 밑을 따라 날렵하게 잘려나가 있었다. 왼쪽 귀밑에서 오른쪽 귀밑까지, 어느 힘센 손아귀가 예리한 칼로 한 동작에 그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언월도 형상으로 벌어진 목의 속살은 아가미처럼 붉었다. 숨 쉬듯 펄떡거리는 착각마저 들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밑에선 새카만 눈동자가 시선을 맞대왔다. 내 눈을 쏜살같이 찔러오는 발톱 같은 눈이었다. 가까이 와, 라고 명령하는 눈이었다. (32.p)
마지막은 기호학이다. 정유정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하여 악이 형성되는 과정을 서술했다. 책의 제목과 유진의 직업, 사건의 발단지, 살해도구 등에 숨어 있는 코드를 찾아가며 소설을 읽으면 훨씬 재미있다. 소설가들은 아무 단어나 사용하지 않는다. 소설에 사용된 모든 배경과 단어들은 그들이 치밀하게 설계하고 의미를 부여하여 배치한 것들이다
카타르시스를 주는 문학과 영화의 공통점은 결국 공포와 연민이 해소가 되어진다는 점이다. 우리의 현실의 공포와 연민, 그리고 역겨움도 해소가 된다면 우리는 현실에서도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