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기 구겐하임, 미술 투기, 현대미술
2017년 2월 '페기 구겐하임'에 대한 다큐 영화(2015년작)가 한국에 상영되었다. 그녀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위치한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의 설립자이며 마르셸 뒤샹의 제자, 잭슨 폴록의 후견인이고, 위대한 전시가이다. 그녀는 '하루에 그림 한 점씩을 샀다'는 것으로도 굉장히 유명하다. 이것은 미술품에 대한 그녀의 집착을 보여주는 대목인데, 그래서 그런지 다큐 영화의 서브 제목이 바로 'Art Addict'이다.
그녀의 광적인 미술품 집착은 후대에 미술품을 전해주는 커다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수많은 미술작품들이 사라졌을 것이고, 에른스트나 부르탕 등 현대 미술 작가군들이 나치의 총 아래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20세기 현대 미술이 자리 잡는 데 있어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그녀는 칭찬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한다. 과연 그녀를 비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히틀러가 일으킨 2차 세계 대전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독일군은 수많은 나라들을 점령해왔으며, 프랑스 공격도 곧 일어날 것만 같았다. 독일군이 노르웨이로 진격한 날, 파리에 있던 페기 구겐하임은 페르낭 레제의 스튜디오에서 한 작품을 구매한다. 그 가격은 단 1천 달러. 이렇게 싼 가격에 미술품을 구입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당시의 수집가들은 작품을 지키기 위해 피난을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가 언제 공습을 당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사람조차 피난 가기 어려운 판국에 작품들을 가지고 떠나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술작품을 누군가가 구입해준다는 것은 작가들에게 무엇보다도 감사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했던 작품들이기에 그들은 미술작품을 헐값에 처분했다. 이 시기에 페기 구겐하임은 당시의 애인이었던 에른스트와 함께 매일 한 점의 작품을 구매한다.
그녀는 이렇게 구입한 작품들을 미국으로 옮겨간다. 마르쿠시스, 에른스트, 브랑쿠시 등의 당대 최고의 미술작가들의 작품들은 미국에서 전시가 일어나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전쟁에 의하여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커다란 감격이었다. 또한 그녀는 당시에 유럽에서 활약하던 많은 예술가들이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후대에 미술 평론가들은 이러한 페기 구겐하임을 '전쟁에서 예술을 지켜낸 여인'으로 평가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영국으로 확장되자 페기 구겐하임은 1940년 12월 유대인들의 유럽 탈출을 위한 비상구조위원회에 50만 프랑을 기부해 유대인 구조 작전을 실질적으로 지원했으며 사재를 털어 샤갈, 앙드레 마송, 쿠르드 셀리히만, 막스 에른스트 등 예술가들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했다. ( 지식e Season7: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지식 中)
"내 첫 번째 성취는 잭슨 폴록, 두 번째는 아트 컬렉션이다."
많은 이들은 2차 세계 대전에서 수많은 미술품들을 미국으로 옮겨 온 것은 페기 구겐하임의 가장 커다란 성취라고 꼽는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성취 중 첫 번째를 '잭슨 폴록'이라고 말한다. 20세기 현대 미술의 슈퍼스타 잭슨 폴록을 발견한 것이 바로 그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 없이 피카소의 그림을 흉내 내는 정도의 잭슨 폴록의 재능을 페기 구겐하임은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물질적인 후원과 더불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게끔 도와줬다. 그녀는 그에게 매월 꾸준한 후원금과 전시회를 열어주고 그의 그림을 판매하는데 시간을 할애했다. 마침내 구겐하임 미술관의 목수에 불과 했던 잭슨 폴록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찾게 되고 미술 화랑의 최고 스타가 된다.
우리 화랑에서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을 때 폴록은 초현실주의와 피카소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지만, 그 영향을 극복하고 놀랍게도 피카소 이후 가장 위대한 화가로 발돋움했다. 그는 안정된 상태에서 작업을 하기 위해 고정된 월수입을 원했다. 나는 그와의 1년 계약에 동의했다. 월 150달러와 그해 말 그의 작품이 2,700달러 이상의 가치로 팔릴 경우 화랑 몫인 3분의 1을 제외한 금액을 주기로 했다. (116p,「페기 구겐하임 자서전」)
작품에 담겨있는 스토리 덕분인지, 2차 세계 대전 가운데 살아남은 예술작품들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페기 구겐하임은 헐값에 매각한 이 작품들을 아주 비싼 값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녀는 브르탕, 뒤샹, 몬드리안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예술가들과 친구였다. 그들의 작품들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후원하는 잭슨 폴록, 이브 탕기 등이 유명한 화가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그녀는 이렇게 얻은 작품들을 전시하고 판매함으로써 부를 축적했다. 21살 1천만 달러를 유산으로 받은 그녀의 재산은 500억 불을 넘어서게 된다.
페기 구겐하임의 입장에서는 망명한 예술가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림을 비싼 값에 판매한 것이지만, 헐값에 사서 비싸게 판매하는 페기 구겐하임의 방식을 사람들은 '투기'로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의 이러한 활동들에 의하여 미술 시장에는 점점 더 비싼 그림들이 출연하게 되었다. 마치 페기 구겐하임이 미술시장을 망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러한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미술 시장에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닌, 돈을 위한 상업예술들이 출연하게 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실제로 나는 요즈음 생산되는 미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금의 미술은 그림을 돈으로 보는 태도로 인해 엉망이 되고 만 것 같다. 사람들은 이 새로운 운동의 탄생을 돕고 부추겼다는 이유로 지금 생산되는 미술에 대해 나를 비난하지만,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미술의 얼굴은 변모해 왔다. 산업 역명의 결과로써 응당 일어나야 했던 변화였다. 미술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만큼, 세계가 그렇게 광범위하게 그렇게 빨리 변화했으므로 미술 역시 커다란 변화를 겪어야 했다........ 지금은 창작의 시대가 아니라 수집의 시대이다. 우리가 가진 위대한 보물을 보존해 대중에게 보여 줄 의무가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193-194p,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
페기 구겐하임은 예술을 사랑했으며 그것들을 수집했으며 잘 보관하여 대중에게 전했다. 이러한 그녀의 성취와 사회에 대한 기여도는 수집 의도가 어릴 적 트라우마 때문이라던지, 사생활이 문란했다거나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녀의 행동이 미술시장에 부정적인 운동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녀 덕분에 우리는 피카소, 마티스, 몬드리안, 칸딘스키, 클레, 레제, 브라크, 그리스, 에른스트, 미로, 브랑쿠시, 아르프, 자코메티, 립시츠, 콜더, 페프스너, 무어, 잭슨 폴록의 작품을 감상하게 되었다. 그녀는 박수받기에 마땅한 인물이다.
잭슨 폴록의 그림은 왜 유명할까?: https://brunch.co.kr/@hogeunyum/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