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잘 살아낸 맛
[히]
음식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맛보다 기억에 남는 건
종종 그 음식을 먹던 순간의 풍경 같습니다.
여행지에서 하루를 살다 보면
계획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음식들이 있는데
가오슝에서의 한 달 동안 먹은 음식들 역시 대부분 그런 식으로
하루의 흐름 속에 스며 있는 듯 합니다.
이 글은 ‘무엇을 먹었는지’ 보다는
‘어떤 하루에, 어떻게 먹었는지’에 가까운 가오슝의 음식 기록입니다.
가오슝 바다가 보고 싶어 시즈완 해변을 향해 무작정 걷다 보니
무더운 날씨에 어느새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렇게 만난 곳이 중산대학교 캠퍼스 안의 휴식같았던 노천카페.
교정 한쪽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학생들 사이에 섞여 점심을 먹고 있으니
여행자라기보다 잠시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음식은 소박했지만 그 풋풋한 분위기 덕분에 괜히 마음이 느슨해졌던 점심입니다.
대만 여행에서 야시장 한곳쯤 들르지 않는 사람은 없을 듯 하네요.
야시장은 맛집을 찾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 그 도시의 밤 공기를 먹으러 가는 곳 같습니다.
가오슝에서 찾은 얀쳉푸, 리우허, 루이펑 야시장은
분위기도, 사람도, 음식의 결도 조금씩 달랐습니다.
먼저 찾은 곳은 현지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얀쳉푸 야시장입니다.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유독 스테이크 가게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대만식 소고기 스테이크 파스타는 보기만 해도 배가 고파지는 비주얼이더군요.
두 번째로 맛본 돼지내장전골은 가격에 비해 의외로 든든했지만,
먹고 나니 급하게 아이스크림이 당겼습니다.^^
이번엔 관광객이 많이 찾는 리우허 야시장에서 먹은 음식입니다.
리우허 야시장은 확실히 관광객의 비중이 높은 곳입니다.
그래서인지 한눈에 ‘이건 먹어보고 싶다’ 눈길이 가는 음식들이 많더군요.
그중에도 단방에, 한번에 눈에 띈 음식.
삼겹살에 김치를(대만식 김치긴 하지만) 돌돌 말아 구운 삼겹살 김치롤은
익숙한 조합 덕분에 실패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여기에 옛날 통닭과 대만 생맥주 한 잔까지 더하니
여행자의 밤이 제법 그럴 듯해졌습니다.^^
가오슝에서 가장 규모가 큰 루이펑 야시장은
말 그대로 사람에 떠밀려 걷게 되는 곳입니다.
부딪히지 않으려 애쓰며 걷고, 눈에 띄는 음식을 사서 먹고,
또다시 사람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반복.
정신은 없었지만 그 와중에 먹은 굴전과 꼬치구이, 천사지파이는
그날 밤의 활기찬 기억과 함께 야시장다운 장면으로 남았습니다.
다음은 가오슝 시내 식당들과는 다른 차원의 느긋한 휴식을 주는
'치진섬' 여행중에 먹은 음식입니다.
치진섬은 숙소가 있는 보얼예술특구에서 배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이지만,
선착장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도시의 속도가 한 박자 느려집니다.
치진섬 페리 선착장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이 해산물거리입니다.
수조마다 살아 움직이는 새우와 게, 조개들이 가득하고
손님들은 마음에 드는 해산물을 직접 고른 뒤 저울에 달아 가격을 정하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조리해 주는 방식이라 가게가 바로 식당입니다.
현지 사람들은 익숙한 듯 능숙하게 흥정을 하고,
우리는 메뉴판 앞에서 번역기를 돌려봐도 어정쩡 하기만 합니다.
차라리 가격표가 선명이 붙은 영어메뉴판이 있는 식당을 찾는 게 속 편할 듯.
바로 아래 이 식당입니다.ㅎㅎ
(두번째 왔을 때 알게 됐지만, 한국어 메뉴판이 있는 식당도 있네요.
페리에서 내려 해산물거리 시작 초입에!)
섬나라 대만의 남쪽, 치진섬이어서일까요.
바닷바람이 스며드는 거리에서 먹는 점심은 괜히 더 싱싱하게 느껴졌습니다.
비록 회는 없었지만요.^^
또한번은 치진섬에서 일몰풍경이 아름답다는 선셋바에서
일몰 대신 한낮의 바다를 눈앞에 바라보며 먹은 음식입니다.
매콤한 양념에 해산물이 어우러진 매운 해산물 샐러드(11,000원)와
닭고기, 깔라마리, 양파링이 함께 나온 믹스플래터(16,800원).
생맥주와 곁들이기 충분한 음식이었습니다.
메뉴는 이것뿐이었지만,
한낮의 바다와 바닷바람 덕분에 충분히 여유로왔던 점심 시간.
그런가 하면, 치진섬 오가는 페리선착장 앞,
시즈완 빙수거리에서 먹은 빙수들입니다.
치진섬을 두번 오가며 세 종류의 빙수를 맛봤습니다.
10월에서 11월로 접어들었음에도 가오슝의 한낮은 30도를 오르내리니
원래는 빙수를 즐겨 먹는 편이 아닌데도 이 도시에서는 자연스럽게 빙수 가게를 찾게 되더군요.
더위에 빙수 한그릇은 무조건 최고입니다.
그날의 피로와 기분을 한꺼번에 식혀주는 기분이었습니다.
웨이우잉 벽화마을을 둘러본 뒤 점심을 먹기 위해 찾은 곳은
카페 겸 식당인 '마리스 기프트'였습니다.
벽화마을 안에도 작은 현지 식당들이 몇 곳 있긴 하지만,
주변까지 포함해 보면 관광객이 마음 편히 들어갈 만한 곳은
사실상 이곳이 거의 유일한 선택지처럼 느껴집니다.
마침 담백한 음식이 먹고 싶던 차라 닭가슴살 샐러드와
닭고기 백반 같은 메뉴를 주문했는데
깔끔하고, 양도 넉넉하고, 무엇보다 부담 없이 맛있더군요.
가격은 둘 다 약 8천 원 정도.
벽화마을 산책 후 가볍게 한 끼 해결하기에 충분히 적당한 점심이었습니다.
차(茶)의 나라 대만답게 가오슝에서도 거리 곳곳에서
차를 파는 가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복잡하기로 소문난 시장 안에도 어김없이 차 가게 하나쯤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분주한 사람들 사이에서 잠시 멈춰 서서 차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은
그 자체로 망중한 같았습니다.^^
가오슝 거리에서 자주 보이던 버블티 체인점 우스란(50嵐).
버블티의 고향이 대만이라기에 이번에야말로 처음으로 맛을 봤습니다.
외워 간 메뉴 이름, ‘쩐쭈나이차’를 말하니 금방 알아듣더군요.
당도를 직접 고를 수 있어 무설탕과 30% 설탕,
두 가지를 나눠 마셔봤는데 역시 달달한 쪽이 맛은 더 있네요.
톡톡 씹히는 타피오카의 쫄깃한 식감도 생각보다 괜찮았구요.
갑자기 '쩐쭈나이차' 가 무슨 뜻인가 궁금합니다.
쩐쭈는 열대 작물 카사바의 뿌리에서 채취한 식용 녹말로, 검은색 타피오카 알갱이,
나이는 우유, 차는 우리가 아는 차(tea).
전문점은 물론 편의점에서도 쉽게 살 수 있을 만큼,
버블티는 이곳 사람들의 아주 일상적인 음료처럼 보였습니다.
덕분에 ‘대만의 길거리 음료’라는 말이 실감났고,
걸어 다니며 시원하게 마시는 버블티 한 잔이 아침 산책의 즐거움을 한층 더해주었습니다.
가오슝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동안, 여행일기 글 작업을 위해
가오슝 시립 도서관을 몇 차례 다녔습니다.
그 과정에서 도서관 주변 85대루 인근에서 맛본 간단한 길거리 음식들이 꽤 인상적이었죠.
먼저 우리나라 주먹밥과 비슷한 느낌의 찹쌀밥, 쫑즈(粽子)입니다.
쫑즈는 단오절에 먹는 전통 음식이라고 하는데
찹쌀, 돼지 고기, 대추 등의 다양한 재료를 섞어 삼각형으로 만든 뒤
대나무잎 등에 감싸 쪄낸 중국식 주먹밥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속재료에 따라 종류가 달라진다고 하는데 이곳은 콩만 든 쫑즈인지라 말 그대로 찹쌀밥이더군요.
그래서 달달한 소스와 짭잘한 다시장국이 따라나온 듯. (총 2,000원)
부담없이 가볍게 즐기기 좋은 간식이었습니다.
찹쌀을 이용한 대만식 핫도그, '다창바오샤오창(大腸包小腸)'도 경험했습니다.
불에 구운 돼지 소시지를 찹쌀로 만든 더 큰 소시지가 감싸듯 붙여 만든 간식인데,
글자 그대로 ‘큰 창자에 싸인 작은 창자’라는 재미있는 뜻을 가지고 있네요.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대만식 찹쌀핫도그가 뭔가 궁금했는데 바로 이런 맛이더군요.
부드럽고 쫄깃한 찹쌀과 감칠맛 나는 소시지가 어우러져,
일반적인 핫도그와는 달리 씹을수록 깊고 담백한 맛이 느껴졌습니다.
작은 간식이라기보다 든든한 한 끼로도 충분할 정도였습니다.
85대루 인근, 전통시장과 골목에는 수많은 음식 가게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그러나 식당 간판을 아무리 들여다봤자 뭐가 뭔지 우리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
결국 도서관 앞 골목, (음식사진 있는 메뉴판을 갖춘) 식당가에서
맛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음식 위주로 몇가지를 골라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소소한 길거리 간식부터 소박한 식사까지,
도서관 근처에서 맛본 몇가지 음식들은
가오슝의 일상 속에서 따뜻하고 편안한 한끼의 맛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가오슝 거리 곳곳에는 반찬가게 겸 식당이 많습니다.
장기 여행자에게 너무나 고마운 식당인거죠.
현지 사람들이 집밥으로 먹을 법한 반찬들을
눈으로 보고, 먹을 만큼만 골라 담을 수 있습니다.
향신료나 간도 비교적 순해서 낯선 입맛에도 부담이 적습니다.
그런 덕분에, 어느새 이곳은 우리에게 가장 자주 찾게 되는 식당이 되었습니다.
숙소가 있는 보얼예술특구를 어슬렁거리다 먹은 주전부리들.
간식, 커피, 그리고 술까지 조금씩 맛봤습니다.^^
먼저 펑리수 전문점 ‘써니힐’에 들렀습니다.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선물용으로 많이 사가는 펑리수(파인애플 잼이 들어간 작은 케이크)를
써니힐에서는 무료 시식할 수 있다고 하네요.
저녁 시간이라 한산했지만, 낮에는 대기줄이 엄청 길다고 합니다.
우롱차와 함께 주는 두툼한 펑리수 한 조각.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
달콤함이 커피 생각을 불러왔습니다.
그 다음은 커피 탐방.
보얼예술특구에서 우리가 특히 마음에 들어 했던 두 곳입니다.
첫번째, 'RUH Cafe no.5'.
내부는 원두 로스팅 과정을 직접 볼 수 있는 스튜디오 형태로 배치되어 있어,
커피 애호가라면 구경하는 재미까지 있습니다.
드립커피 메뉴 중 케냐, 브라질 원두를 주문했는데,
산미가 살아 있으면서도 깊고 풍부한 맛이 인상적입니다.
단, 일반 카페보다 가격대가 조금 높아 한 잔에 6,400원 정도.
테이크아웃과 매장 내 가격 차이가 꽤 있긴 하지만
기왕이면 앉아서 커피를 즐겨봤습니다.
두번째, '루이자 커피'는 보얼예술특구 안 복합문화공간 KW2에 자리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입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 2,600원으로 가격 부담이 적어,
부담 없이 들를 수 있는 장점이 있죠.
그에 비해 맛도 훌륭해서, 구경하다 잠깐 쉬어 가거나 플리마켓을 돌아다니다
커피 한 잔 즐기기 좋았습니다.
깔끔한 실내와 편안한 좌석 덕분에 여행자들이 짧은 휴식 시간에 들르기 딱입니다.
보얼예술특구에서 만난 마지막 주전부리는 몇가지 술입니다.
보얼예술특구는 주말마다 플리마켓이 열려 현지인과 관광객이 함께 모여 즐깁니다.
그런데 뜻밖에 술을 파는 곳은 많지 않았고, 칵테일 가게 정도만 눈에 띄더군요.
그래서 편의점에서 캔맥주와 꼬치 안주,
대왕오징어구이에 우리의 진로 한 잔으로 소소하게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정식(?)으로 찾아가본 보얼예술특구 안 생맥주 집,
'Beer Talk Cafe & Bar'입니다.
값은 비싸지만, 생맥주 맛이 소문대로 깊긴 하더군요..^^
그러던 어느날, 가오슝에서 시끌벅적한 식당을 모처럼 만났습니다.
저녁에 지하철, 쥐단 역 주변을 걷다가 우연히 눈에 띈,
해산물 식당(阿榮海鮮鵝肉)입니다.
핸드폰 큐알코드로 한국어로 된 메뉴판이 있어서 음식시키기도 너무 편합니다.
무엇보다 손님들 테이블마다 술병들이 그득!ㅎㅎ
항구도시 가오슝에 와서 제대로 된 싱싱한 해산물을 처음으로 맛봤습니다.
안주가 좋으니 타이완 생맥주도 술술~ 고량주도 술술~ㅎㅎ
오랜만에 가오슝 길거리 술집에서 마냥 기분좋은 밤을 보냈네요.
그렇게 가오슝에서의 한 달은 특별한 미식의 기억보다
하루를 잘 살아냈다는 소소한 포만감으로 마음에 남았습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그런 음식들이었습니다.
*이 글은 대만 가오슝 한달살기 중(2023년 가을), 가족 카페에 실시간으로 남겼던
기록을 바탕으로 '현재의 생각'을 때때로 덧붙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