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먹고, 조심스럽게 익숙해지다
[히]
-이 글은 미식가의 맛집 탐방기가 아니라,
가오슝에서 한 달을 살며 하루하루 먹고 느낀, 아주 개인적인
‘입맛의 기록’입니다.
대만은 동북아 주변 국가들의 영향을 받아 음식의 종류가 유난히 다양한 나라입니다.
육류, 해산물, 간식거리 할 것 없이 색다른 맛과 향이 뒤섞여 있어
여행자에게 자연스럽게 음식에 대한 기대감을 품게 만듭니다.
그만큼 가오슝에서 한 달 살기를 시작하며
‘대만에서 무엇을 먹게 될까’ 하는 호기심도 컸습니다.
값싼 길거리 음식은 물론, 음식의 보물창고라 불리는 야시장까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먼저 풍성했습니다.
(물론 태국이나 베트남 음식의 매력도 만만치 않지만요.^^)
시작은 참 좋았습니다.
저희 부부는 평소 식성이 좋은 편이라 음식 앞에서 비교적 관대한 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며칠이 지나자 대만 음식 특유의 향신료 맛이
조금씩 입에 남기 시작했습니다.
대만을 ‘미식가의 천국’이라 부르는 이유를 그때서야 알 것도 같았습니다.
그 천국은, 향신료의 미묘한 차이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랄까.
음식 앞에서 향신료 맛이 과한가, 덜한가로 온통 맛의 기준이 정해지는 입맛이고보니
우리는 아무래도 미식가는 아닌 듯 합니다.^^
낯선 나라에서의 한 끼는 늘 신중할 수 밖에 없는데 아마 여행자라면
그 마음이 다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요.
우리가 식당을 고르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첫 번째,
구글 지도에서 그날 동선에 맞는 식당이나 카페를 찾고 후기를 꼼꼼하게,
어엄청~ 살펴본 뒤 방문하기.
두 번째,
아무 정보 없이 그날의 직감에 맡겨 무작정 들어가기.
두 번째 방식으로 만난 음식 이야기는
다음 글, ‘대만 현지음식 이야기 2’에서 풀어보려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첫 번째 방법으로 만난,
대만의 전통 음식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봅니다.
-단빙(Dan Bing), 대만식 계란 팬케이크
밀가루 전병에 계란을 풀고, 양파, 햄 등 원하는 재료를 더해
철판에 구워내는 아주 단순한 음식, 단빙.
대만의 대표적인 아침 식사로 이른 시간 거리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아침 식당들은 대개 새벽에 문을 열어 오전까지만 영업하는데,
단빙은 이동 중에도 간편하게 먹기 좋아 여행자에게 특히 반가운 음식입니다.
무엇보다 향신료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첫날부터 마음 편히 먹을 수 있었습니다.
기름기가 살짝 있어 함께 파는 밀크티와도 잘 어울리고 가격도 착합니다.
어디서든 한 장에 우리 돈 천 원 남짓.
‘오늘 하루는 무난하게 시작하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주는 음식이었습니다.
-또우장(豆漿,콩물), 요우티아오(막대도넛)
단빙 못지않게 대만의 아침을 대표하는 조합이
'또우장(豆漿)'과 '요우티아오'입니다.
담백한 콩물에 막대 도넛처럼 생긴 요우티아오를 적셔 먹습니다.
설탕이나 소금을 전혀 넣지 않은 ‘칭 또우장(淸豆漿)’은
처음엔 다소 밍밍하게 느껴지지만 씹을수록 고소한 콩 본연의 맛이 살아납니다.
분주한 아침 거리, 출근길 사람들 사이에서
같은 음식을 나눠 먹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이 도시는 조금 더 친근해집니다.
여행지에서의 아침이 유독 정겹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 이런 풍경 덕분일 듯 합니다.
-우육면(Braised Beef Noodle Soup)
대만 음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우육면.
타이베이에서 고속철을 타고 가오슝 중앙역에 도착해
역사 2층 푸드코트에서 처음 맛봤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첫 그릇은 ‘왜 유명한지 잘 모르겠는 맛’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오슝에서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에게
맛집으로 꼽힌다는 '항원우육면'을 찾아갔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역시 소문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비빔 우육면은 담백한 양념이 두툼한 면발에 스며들어 씹을수록 감칠맛이 났고,
두꺼운 소고기는 왤케 부드러운지, 진짜 입안에서 살살 녹는 맛이랄까.
돼지고기 국수 역시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찧은 마늘과 고추가루, 식초 한 방울을 더하니
어딘가 한국적인 맛으로 변주되는 것도 재미있었구요.
우육면은 두툼한 소고기를 오래 삶아서 엄청 부드럽게 만든 후에
밀가루 면과 함께 먹는, 한마디로 '소고기 국수'같은 것인데 세 종류가 있다네요.
맑은 고기육수 국물의 '칭뚠', 매콤한 맛이 나는 빨간 국물 '홍샤오',
국물 없이 비벼먹는 '뉴러우반미엔'이라는데...
어려운 이름 알아봤자 그다지 소용은 없더군요.ㅋㅋ
이번에는 '삼우 우육면'의 우육면을 맛봤습니다.
이 식당 또한 가오슝에서 항원 우육면 못지 않게 알려진 맛집인데
가오슝 관광명소인 '연지담 풍경구' 바로 인근에 있네요.
그런데 삼우 우육면은 우선 항원우육면과 주문과정이 좀 다르네요.
항원우육면은 줄을 서있다가 카운터에서 주문 후, 지정해주는 좌석에 앉으면 됐는데
삼우우육면은 이용방법이 따로 있습니다.
1.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스스로 자리를 잡고 테이블 번호부터 확인.
2. 주문하는 곳에 줄을 서서, 메뉴판에 테이블 번호를 적고 주문할 음식을 체크.
(체크 안하고 사진만 보여줘도 계산할 때 주인이 친절히 알아서 해주네요^^)
3. 줄 서있는 곳에서 식판에 사이드 메뉴들 중 원하는 반찬(별도계산) 있으면 올린 후, 차례되면 계산
4. 자리에서 기다리면 음식이 나옴
얇은 면발을 선택해서 비빔우육면과 소고기탕 우육면을 먹어봤는데
제 개인적인 입맛에는 항원우육면에서 느꼈던 그 깊은 만족감이 조금 더 오래 남습니다.
맛이라는 게 참, 숫자로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라는 걸 이럴 때 새삼 느낍니다.
우육면이 얼마나 유명하면 컵라면으로도 나와 있습니다.
'만한대찬'은 컵라면과 봉지라면이 있는데 총 네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네요.
첫번째가 기본 우육면인 보라색, 두번째로 살짝 매콤한 주황색,
세번째는 살짝 매콤한 돼지고기가 들어간 초록색, 네번째는 마라가 들어간 빨간색이 있는데
한국사람들은 보통 보라색이나 빨간색을 선호한다는군요.
우리도 보라색 우육면을 맛봤습니다.
처음엔 '컵라면 하면 우리나라지, 무슨 우육면 컵라면이라고?'
하는 생각이 솔직히 있었습니다.
근데 막상 뚜껑을 열어 맛을 한입 보고는 깜놀!
실제 우육면보다 더 감칠맛이!
꼭 라면보다 컵라면이 더 감각적인 맛이 있듯이 말이죠.ㅎㅎ
-딤섬(點心)
대만에서 딤섬은 우리에게 익숙한 ‘만두’ 그 이상으로 느껴집니다.
처음 맛본 훈둔탕은 하루의 피로가 스르르 풀릴 만큼 국물이 유난히 담백했습니다.
사실 대만에서 딤섬의 의미는
우리의 떡볶이, 어묵, 붕어빵처럼 가볍게 즐기는 간식이자
전 국민이 일상처럼 사랑하는 음식이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딤섬이 여러 종류의 만두인 만큼,
이런 물만두국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딤섬에 속하겠지요.
다음으로 먹은 딤섬은 가오슝에서 유명한,
가성비 좋은 로컬맛집 '후덕복'에서 입니다.
무제한 무료 밀크티가 제공된다는 곳.
딤섬 두가지를 비롯하여 후덕복에서 먹은 음식은 다 좋았습니다.
특히 야채만두가 참 쫄깃, 담백하고 맛있더군요.
물만두 국에 들어간 큼직한 돼지고기 만두도 포만감 있었구요.
단팥전병은 맛은 있는데 달아서 낫굿.
그런가하면, 딤섬 메뉴중에 한국사람들이 제일 선호한다는 '샤오롱바오'.
'샤오롱(小籠)'이라는 대나무 찜통에서 쪄냈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만두소로는 대부분 돼지고기를 사용하고 흥건한 육즙이 가득한 것이 특징이라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거리에서 쉽게 만나는 샤오롱바오는
몇 번을 먹어도 크게 감동적이진 않았습니다.
딤섬 맛집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식당, '딘타이펑'이
가오슝 한신아레나 지하 1층 건물에 있다는 말만 들었는데
그곳의 샤오롱바오 맛은 달랐을까요?
그러던 차, 가오슝 한달살기를 마치고 타이페이에 와서야
윤캉제, 딘타이펑 본점(테이크아웃만 가능한 곳)에서 샤오롱바오를 제대로 맛볼 수 있었습니다.
딘타이펑이 테이크아웃만 가능한 가게가 있고, 그 주변에 식당도 따로 있네요.
차분히 음미하며 먹고 싶어서 먼저 식당으로 찾아갔습니다.
타이페이 딘타이펑 본점에서 맛본 샤오롱바오는 진짜로 맛있었습니다.
음식값도 두배지만 맛의 밀도도 두배.
그동안 몇차례 먹은 샤오롱바오 중에 가장 만두피가 부드럽고, 가장 육즙이 많았습니다.
한입 베어물자 기름지지 않은 뜨거운 육즙이 입안에서 조용히 퍼지는 순간,
'인생딤섬'으로 마음에 남았습니다.^^
-오리고기
보얼예술특구 근처 로컬맛집,
오리고기 전문점 '압육진(야로유전)'입니다.
보얼예술특구 인근을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한 찐로컬 오리고기집인데
일단 긴 대기줄을 보자 뭔가 있구나 싶어서 우리도 과감히 합류했습니다.
대기줄에 서서 열씨미 검색을 달려보니 이곳 압육진이
관광객과 현지인이 북적이는 오리고기 맛집으로 나와 있네요.
호~~ 아주 잘 찾아온 듯!
(긴줄에 비해 생각보다는 빠른 진입. 약 20여분만에^^)
메뉴도 비교적 간단한 듯?
메뉴 그림판만 봐도 쉽게 주문 가능하네요.
오리고기, 오리덮밥, 나물(공심채), 탕 중에 오리고기만 빼고
나머지 세가지를 주문해봅니다.
오리덮밥에 올려진 오리고기가 다행히 특유의 향이 없이 살이 부드러운 데다
사진에 있는 빨간 소스(매운 초고추장 느낌?)를 비벼먹으니 더욱더 맛있어지더군요.
탕국물은 우리나라 닭계장처럼 시원한 맛이어서 덥밥과 잘 어울렸습니다.
현지식당들중에 맛집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막상 가서 보면 식당 안팎 분위기가 낡고 어수선하고,
무엇보다 앉을 자리가 비좁아서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럼에도 음식을 먹어보면 맛집 맞구나 싶지만요~^^)
압육진은 음식 맛도 좋았지만,
실내외가 환하게 툭 터져서 음식을 먹는동안 여유가 느껴져서 더 좋았습니다.
찐 동네사람들 같은 현지인들만 거의 전부 같았던 식당.
다시 와서 먹고 싶은 곳.^^
-루로우판(滷肉飯), 돼지고기 덮밥
꼭 우리의 감칠맛 넘치는 짜장덮밥처럼 '루로우판'도 첫맛이 짭잘, 달콤합니다.
특유의 향기로운 식감까지 있어서 다른 반찬 없이도 밥 한그릇이 순식간에 없어집니다.
(대만도 밥 한그릇 양이 너무 작긴 하네요. 요즘은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루로우판 역시 우육면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인기가 있는
대만의 국민 먹거리라고 합니다.
간장과 오향소스 등에 푹 졸인 돼지고기를 두부나 채소 등과 함께
밥 위에 올려서 먹는 음식인데 값싸게 먹을 수 있는 대표적인 서민 음식답게
음식 값도 다른 음식에 비해 유난히 착합니다.
양념된 돼지고기만 시키면 대만돈 45원(1,800원), 밥은 20원(800원).
-훠궈
이번엔 맘먹고(제 기준, 맛도 그닥인게 착한 가격도 아니므로^^)
훠궈 식당에서 훠궈를 맛봅니다.
낯선 외국 식당에서 음식 하나 선택해서 잘 먹는 일이 참 쉬운 적이 없지만
훠궈라는 음식은 우리에겐 더더욱 대략난감입니다.
메뉴판 왼쪽 아래에 있는 매장 이용방법도 잘 읽어보고,
뭘 어떻게 먹어야 가성비 있게 잘 먹은 선택일지 연구 끝에
우리가 주문한 음식.
이번 훠궈 역시 마라홍탕은 여전히 적응이 안되는 맛이었고,
다행히 백탕은 담백한 맛이어서 백탕에 담군 마블링된 소고기를
직접 만든 다양한 소스에다 찍어먹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더군요.
무엇보다 고소한 미트볼 완자가 맛있었습니다.
리필코너의 흰밥과 우엉반찬도 입맛을 돋구는 맛이었구요.
마라탕 안에 기본으로 넣어주는 마라선지, 두부도 요청하면 무료로 제공한다는데
저희는 충분.
이렇게 먹은 훠거값은 다 해서 약 6만원이네용.(부가세 10%까지)
-로우위엔(肉圓)과 사신탕(四神湯)
역시나 대만의 국민 먹거리, 로우위엔과 사신탕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이 로우위엔과 사신탕을 한달살기 초기에
어쩌다가 우연히 숙소 동네식당에서 맛보고 난 후부터,
아마도 대만 음식의 그 미묘하고도 설명하기 힘든 향신료 맛에
약간은, 무작정 질리지 않았나 조심스레 추정을 합니다.ㅋㅋ
이 식당은 저희 숙소(보얼예술특구) 바로 옆집 식당인지라
매일같이 식당 앞을 지나치곤 했는데,
허름하게 보이는 외관과 달리 늘 손님들이 앉아서
음식을 너무나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을 보다보니
점점 식당 음식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며칠 후, 눈길이 간 횟수만큼이나 '알 수 없는 신뢰'가 쌓여가던 어느날,
쫀득하니 맛있게 생긴 저 똥그라미와, 뜨끈한 국물을 우리도 먹어보기로 했습니다.
대만의 찐 전통 음식, '로우위엔'과 '사신탕'인지는 꿈에도 모른 채 말이죠.
로우위엔과 사신탕에 대해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설명합니다.
로우위엔의 겉껍질은 고구마전분, 쌀가루 등으로 만들어져서 쫄깃거리고
속은 주로 돼지고기, 죽순, 표고버섯을 넣어서 튀기거나 찌는데 쫀득한 맛이 가히 일품이다.
사신탕은 4가지 한약재료에 돼지곱창을 넣어서 끓이는 건강보양탕으로
대만 곳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인기음식이다.
사신탕 속에 돼지곱창같은 것이 보이지만 눈으로 보기에는
꼭 제가 좋아하는 마알간 홍합탕 국물같고,
탱글한 우무처럼도 보이는 로우위엔도 다 먹을만하게 보이더군요.
그러나 막상 한입 맛을 봤더니... 아 뭐라고나 할까... 역시나 설명을 잘 못하겠어여~ㅋㅋ
먹어보면 못 먹을 맛은 아닌데, 다시 떠올려지지는 않는 맛이랄까.
우리의 쐬주와 고추장만으로는 결코 역부족.
나중에 알았지만, 음식들에 칠리소스같은 매콤한 양념들을 팍팍 뿌려서 먹었어야 했군요.
(식당에 양념들이 다 준비돼 있었는데 모르고 안가져옴).
왠지 그 후부터인 듯합니다.
대만음식을 먹기 전에 괜스레 긴장과 의심의 눈초리가 많아진 것이.ㅋㅋ
대만 음식이 중국 본토 음식에 비해 그래도 향이나 간이 자극적이지 않아서
심지어 먹거리 여행을 와서 음식을 즐기는 한국사람들도 많은 걸로 압니다.
그렇게 대만 음식은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익숙해지느냐, 끝내 익숙해지지 않느냐’의 문제처럼 느껴집니다.
과연 우리는 가오슝의 남은 시간 동안 조금 더 대범해질 수 있었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글, ‘대만 현지음식 이야기 2’로 이어집니다.^^
*이 글은 대만 가오슝 한달살기 중(2023년 가을), 가족 카페에 실시간으로 남겼던
기록을 바탕으로 '현재의 생각'을 때때로 덧붙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