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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Ma May 11. 2016

기억의 공백

꼬꼬마의 글공간

기억의 삭제

혼란한 상황

모르는 가족

급격한 노화

탈출의 불가

진실은 진실일까?



*

눈을 뜬다. 머리가 아프고 몸을 움직일 수 없다.

분명 어제 그녀와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의 일들이 머리 속에서 사라졌다.

팔목이 따갑다는게 느껴진다.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팔목에 검버섯 같은 점들이 군데군데 보이고 링거 바늘이 꽂아져 있다.

사고로 화상이라도 입은 것일까 손에 주름이 가득하다.

일어나려는데 허리에 아주 큰 통증이 느껴져 앉을 수 없다.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저기요! 저기요!"


간호사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이 뚜벅뚜벅 느리게 걸어온다.


"할아버지~ 깨셨어요?"

"할아버지? 내가 할아버지라고?"

"오늘따라 왜 그러세요 그럼 오빠라고 불러드려야 되나?"


어제까지만 해도 잘 나가는 회사에 취직해 그녀와 결혼을 예정하고 있었는데 무슨 소리일까.

밝게 웃으며 할아버지라 얘기하는 간호사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이 이상하다.

일단은 저 사람을 간호사라 하자, 지금 내가 어떤지 확인해봐야겠다.


"간호사님 거울... 거울! 거울 좀 가져다주세요!"

"할아버지 왜 소리를 치세요 진정하세요 가져올게요."


왠지 심장이 멈출 것만 같다. 긴장이 흐른다.

간호사가 거울을 가져온다.


'얼굴을 봐야겠어 얼굴을...'


하지만 곧 그 긴장은 현실이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나는 노인이 되어있던 것이다.

듬성듬성한 머리카락과 온 얼굴에 주름이 뒤덮여 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노인이 됐다니..."

"오늘따라 이상하시네~ 그럼 젊은 오빠겠어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병원에 오신지 6개월이나 되셨어요"

"말도 안 돼 난 분명 어제..."


무언가 잘못되었다. 지금 상황이 틀린 것이다.

저 간호사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간호사가 방의 입구로 걸어간다.


"필요한거 있으시면 저기 벨 누르시면 돼요 금방 다시 올게요."


상황을 진정한 상태로 다시 한번 확인해본다.

방안은 1인실이다. 2~3평 정도 되어 보이고 깨끗하다.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 것만 같고 몸 상태를 보기 위해 이곳저곳을 움직여본다.

손가락, 손목, 팔뚝, 발가락, 발목...

온몸의 상태는 정상이다 다만 너무 쑤시고 진짜 노인이 된 것처럼 몸이 너무 무겁다.

그리고 허리가 너무 아파 일어서기가 매우 힘들다.


'씨발... 이건 무언가 잘못됐어...'


가만히 기억을 쥐어짜보지만 도무지 내가 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 떠오르지가 않는다.

아픈 허리를 참으며 그 자리에 앉는다.


'전화를 해야 돼...'


그녀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도움을 요청해야 된다. 이건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

손목에 꽂아져 있는 링거를 뺀다.

피가 흘러내리지만 지금은 이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리고 일어서려 발에 힘을 준다.

무릎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지만 괜찮다.

다만 다리의 힘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절뚝거리며 문 앞으로 걸어간다.

문을 옆으로 밀고 나가려는데 간호사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할아버지 여기 나가시면 안 돼요 화장실 가고 싶으세요?"

"아니... 그게... 나 밖으로 나가야 돼..."

"안돼요 안돼요 어서 들어가세요 아이고 피봐 링거는 또 왜 빼셨어요 얼른 들어가세요."


나의 어깨를 잡는 간호사의 악력이 느껴진다.

분명 여기서 힘으로는 문밖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대한의 정보라도 얻어야 된다.

문 밖의 여기저기를 쳐다보려 고개를 내밀어 본다.

다른 노인이 간호사와 함께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는 수상한 말을 한다.


"집에 보내줘... 집에 갈래..."


다시 침상으로 돌아온다.

나와 같은 상황의 사람들이 더 있는 것 같다.

다른 노인이 보이고 감시하는 간호사 같은 사람들... 노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그다지 큰 무력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생체 실험인 것일까?

하룻밤 사이에 급격하게 얼굴이 60세는 훌쩍 넘을 것 같은 노인이 되었다.

기억은 여기저기 구멍이 나있는 것 같고 둔기에 맞은 듯 통증이 지속된다. 아니 온몸에 통증이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아직 정보가 많이 부족하니 조금 더 상황을 관찰하고 나서 행동해야 된다.

혹시 또 기억을 없앨 수도 있으니 지금의 일들을 몰래 기록해야 된다.

간호사는 내 손에 피를 닦고 다시 링거를 꼽지 않는다.

그리고 잊은 것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또다시 밖으로 나간다.

나는 얼른 적을 것을 찾으려 옆 탁자 서랍을 뒤져보지만 아무것도 없다.

배게 속에 손을 넣어보니 손바닥 크기의 얇은 수첩과 볼펜이 있다.


첫 장을 천천히 펴본다. [이것을 처음 본 것이라면 기억이 또다시 삭제된 것이다○○]

두 번째 장 [1일, 급격한 노화, 기억 삭제, 간호사, 또다른 노인들]

세 번째 장 [2일. 탈출 시도, 문밖 1m 가량, 간호사 항시 대기]

네 번째 장 [3일, 급격한 컨디션 악화, 앉기 겨우, 다른 노인 문 밖 접선 시도, 실패]


그 뒤로는 아무 내용도 적혀있지 않다.

동그란 표시는 무엇일까.

두 번의 기억 삭제 후 보게 된 것일까.

난 또다시 알고 있다는 듯 동그라미를 그린다.

왠지 어떤 비밀이 있고 그것을 밝혀내려 시도했던 나의 행동들인 듯하다.

문 밖의 기척이 느껴져 얼른 수첩과 볼펜을 배게 밑으로 숨기니 간호사가 들어온다.

손에는 주사기와 그 속의 액체를 채울 것으로 보이는 작은 약병이 있다.

링거병을 한번 바라보더니 줄 끝에 있는 바늘을 새것으로 갈고 내 손목을 잡는다.


"조금 따가우실 거에요."

"왜 링거를 놓는 거지? 나는 아무렇지 않아!"

"영양제에요 요즘 기력이 떨어지셔서 놓아드리는 거에요."


상황을 아직 제대로 알 수 없으니 간호사가 하는대로 그냥 둔다.

간호사는 링거를 꼽고는 주사기에 약을 채운다.

그리고 링거에 주입한다.


"조금 진정되실거에요."


맙소사...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한다.

마치 술에 취한 것 같고 온몸에 힘이 풀린다.

간호사는 나를 웃으며 바라본다.


"내일은 가족이 온데요. 진정제 놓아드렸으니 한숨 푹 주무시면 기분이 나아지실거에요."

'아... 안돼... 잠들면 안돼...'



 **

눈을 뜬다. 어제의 기억이 또렷하게 난다.

아마 어느 정도까지는 기억이 유지되는 것으로 보인다.

간호사의 기척이 느껴진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간호사가 침상의 옆에 앉아 졸고 있다.


"간호사... 간호사..."

"음아어 네? 일어나셨어요? 잠깐 졸았네요"

"내가 얼마나 잔 거지...?"

"하루 지났어요. 요즘 몸이 안 좋으셔서 계속 오래 주무시니까"

"오늘 가족이... 온다고 했던가?"

"네 조금 이따가 올 거예요 아직 시간이 이르니까"


나의 부모님이 오시는 걸까. 가족이란 대체 어떤 사람이 온다는 것일까.

너무 혼란스러워 가족들의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문이 열리고 여자의 목소리가 간호사를 부르더니 바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링거를 맞으며 오래 잠들어서인지 어제보다는 몸 상태가 좋아졌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들어온다.

여러 명의 사람이 보이고 그중 늙은 여인이 하나 보인다.

다들 내가 누워있는 침대로 둥글게 둘러싸고 나를 바라본다.

누군지 아무도 모르겠다.

젊은 남자가 시선을 낮춰 내 손을 잡더니 얘기한다.


"아버지 저희 왔어요 오늘도 기억 안 나세요?"

"당신이 내 아들이라고?"

"네 아버지 큰아들이에요 여기 어머님이랑 동생, 제 안사람이랑 손주, 손녀도 왔어요"

"나는 당신들을 몰라..."


모든 상황이 더 혼란스럽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몰려와 가족이라 말하고 결혼도 하지 않은 나에게 마누라가 있다니 절대 인정할 수 없다.

동공이 흔들렸다. 심장이 격하게 두근거렸다. 입은 소리칠 수 있었지만 급격히 늙어버린 몸은 도무지 일어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야... 아니야! 대체 여긴 어디야 당신들은 누구야!"


내가 흥분을 하자 간호사는 급하게 밖으로 나가 주사기를 가져오더니 링거에 주입한다.

급격하게 흥분이 가라앉고 몸에 힘이 풀린다. 간호사가 양손으로 내 양쪽 팔뚝을 주무른다.

또다시 문이 열리고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가족분들이시군요. 담당 의사입니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으신 것 같으니 자리를 옮겨서 얘기 나

누실까요"


하얀 옷 남자의 안내에 따라 가족이라 말하는 자들이 밖으로 나가고 간호사가 내 옆에 앉는다.

움직일 수가 없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 곳이 없다. 대체 어떻게 된거지... 모든 것이 거짓이다.

나의 생각은 이렇게 멀쩡한데 마치 내가 정말 병원에 입원한 늙은 노인이 된 것처럼 돼있는 지금의 상황이 혼란스럽다.


"간호사... 내가 정말 늙은 노인인가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조금 쉬시면 기억도 나실거에요"


모든 상황들을 마치 내가 수긍하라는 듯 만들어 놓는 것 같다. 이곳의 갇혀있는 인간들은 노화되어 기억을 잃은채 이렇게 쇠뇌 당하고 있는 것일까.

방금 들어온 가족들이 또다른 병실도 들어가 똑같이 가족이라 칭하며 갇힌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사기를 치는 사기꾼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왠지 수상하다.

졸음이 몰려온다. 잠들면 안되는데... 잠들면 안되는데... 안감힘을 써도 결국 입에서 신음만 흘러나온다.


'아... 아... 아... 아...'



***

눈을 뜬다. 아직도 기억이 또렷하게 난다.

간호사는 자리를 비웠다. 지금의 상황들을 또다시 적어놔야 된다.

힘겹게 아픈 허리를 참으며 자리에 앉아 배게 속의 수첩과 펜을 꺼내 두 번째 장을 편다.


'두 번을 잠들었으니 3일째고 어제의 일이니...'


세 번째 장 [2일. 탈출 시도, 문밖 1m 가량, 간호사 항시 대기]

            [모르는 가족, 흥분시 진정제 투여, 기억 삭제 언제?, 나의 의심 알음, 탈출 루트 확보 시급]


일마다 단어들을 적어놓는 이유는 내 기억이 언제 삭제가 되고 무엇들을 해왔는지 알기 위해서다.

수첩과 펜을 다시 배게 속으로 숨긴다.

첫 번째 장의 문장이 신경 쓰인다.


[이것을 처음 본 것이라면 기억이 또다시 삭제된 것이다]


아마 나는 기억이 삭제된 상태로 몇일씩 혹은 몇달씩 계속 무언가를 시도해왔을 것이다.

이미 이들은 나의 이런 행동을 예상하고 가짜 가족을 불러 수긍하게 만든다던지 탈출하지 못하도록 감시를 하고 있을 수 있다.

쉽게 생각나는 것들은 시도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더 신중하게 행동해야 된다.

늙어버린 몸의 마지막 숨은 언제 올지 모르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

갇혀 있는 건물의 규모, 감시자들의 숫자를 알 수 없으니 일단은 탈출 시도를 해서 밖을 확인해봐야 한다.

화장실은 병실의 안쪽에 있고 기저귀가 입혀져 있다.

화장실을 간 기억은 없다. 내가 잠든 사이 몇명의 사람들이 더 들어와 기저귀를 갈았을 것이다.

탈출을 시도할때 가장 걱정되는 것은 몸상태도 그렇지만 극심한 허리의 통증이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들어오며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깨셨네요?"

"저기... 내가 허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복대 같은 것을 찰 수 있을까?"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듯 침대의 탁자 아래쪽에서 복대를 꺼내 침상을 세운다.

침대가 기억자로 꺾이며 나를 일으켜주고 허리가 무지 아프지만 탈출을 위해 참는다.

순순히 허리에 복대가 채워지고 또 한 가지 요구를 해본다.


"혹시 짚고 다닐 수 있는 지팡이 같은 것도 있나?"

"아이고 지팡이로 사람 때리시려고요? 그런 거 없어요"


아쉽지만 허리에 복대를 찬 것만으로도 탈출할 때 허리에 힘이 더해질 것이다.

간호사는 침상을 완전히가 아닌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눕힌다.


"눕고 싶으면 말씀하세요. 오늘은 조금 괜찮으신거 같으니 침상을 조금 세워둘게요"


간호사가 옆에 비스듬하게 앉아 나를 마주 보며 앉아 책을 편다.

소설로 보이는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Rain] 본적이 없는 소설이다.

간호사가 자리를 비우는 순간 탈출을 시도할 것이다.



****

한참 뒤 간호사는 예상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지금이 기회다.

링거 바늘을 조심스럽게 뺀다.

다리를 침대에서 내려 발바닥을 지면에 닿는다.

지금은 아픈 허리도 참아야 된다.

자리에 일어서본다. 급박한 상황에 신경이 곤두서있는 탓인지 왠지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문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문을 옆으로 활짝 열고 본능적으로 왼쪽의 통로를 향해 힘껏 달리려 다리에 힘을 준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발을 절뚝거리고 무릎이 아프다.

여자 간호사들과 하얀 옷을 입은 남자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린다.

타인이 볼 때는 천천히 걸어가는 노인네로 보이는 것인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만 보고 잡을 생각이 없는듯하다.

이대로 뛰어가면 된다. 이대로 정보를 얻어야 된다.

벽면에 붙여진 출구 표시에 계단 모양이 보인다.

조금 더 걸어가 엘리베이터 입구 앞에 서자 나에게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안돼 정보를... 정보를...'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위쪽에 떠있는 층수를 보자 숫자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1... 2... 3... 4...'


흰옷을 입은 남자 두명이 나의 양팔을 잡고 힘으로 잡아끈다.

결국 이정도에서 정보를 얻기 위한 탈출 계획이 마무리된다.

다시 병실 같은 방안으로 들어와 침상에 비스듬히 눕혀진다.

간호사가 옆에 서서 이불로 무릎을 덮어준다.


"할아버지... 그렇게 막 나가시면 위험해요 링거 또 빼셨네!"


간호사는 내 손목에 바늘자국을 보더니 다시 링거를 꼽지는 않고 침상 옆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리모컨을 들더니 티비를 켠다.

티비에서 못 보던 드라마가 흘러나오고 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봄이나 가을인듯하다.



*****

눈을 뜬다. 티비에서 같은 드라마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잠깐 졸은 듯하다.

간호사는 내가 잠에 들어서인지는 몰라도 자리를 비웠다.

아직도 기억이 남아있는 것을 보니 그리 빠르게 기억 삭제를 하지 않는 것 같다.

배게 속으로 손을 넣어 수첩과 볼펜을 꺼낸다.


세번째 장을 펼쳐 그 뒤에 메모를 추가한다.

[2일. 탈출 시도, 문밖 1m 가량, 간호사 항시 대기]

[모르는 가족, 흥분시 진정제 투여, 기억 삭제 언제?, 나의 의심 알음, 탈출 루트 확보 시급]

[5층 이상, 복도 간호사와 남자들, 왼쪽 길 엘리베이터, 자주 자리비움]


밖의 인기척에 서둘러 수첩과 볼펜을 배게 밑으로 숨긴다.

간호사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할아버지 식사하세요"


한동안 탈출에만 신경을 썼더니 배가 고픈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더 수상하다.

왜 식사를 한동안 알아서 주지 않았던 것일까.

침대는 조금 더 세워지고 무릎 위에 탁자가 올려졌다.

음식으로는 죽으로 보이는 하얗고 찰진 것이 나오고 김치, 장조림, 나물, 멀건 된장 국이 나왔다.

간호사는 조심히 죽을 떠서 입에 넣어준다.

음식을 받아먹으며 이곳의 공간을 쭉 둘러본다.

창문과 시계가 없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혹시.. 지금이 몇시인지 아나?"

"7시에요 딱 저녁 드실 시간"

"왜 방에 시계가 없지?"

".... 저희가 때 되면 다 가리켜 드리잖아요~"


무언가 숨기고 있는듯한 저 말투가 신경 쓰인다.

식사시간은 길게 이어진다.

오래 식사를 거른 것인지 목으로 넘기는 행위가 힘들다.

다 먹지 못한 채 식사를 마치고 나의 등을 두드려준다.

간호사는 자리를 정리하며 식기를 챙겨들고 나가더니 다시 고개를 병실로 내민다.


"내일은 종합검사 받으시는 날이에요 오늘은 일찍 푹 주무셔야 돼요"


이곳의 생활에 대한 것들, 시계, 달력, 창문 등 모든 것들을 나에게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 저녁 시간인 것은 진실일까?

아마 저 종합 검사라는 말은 곧 기억의 삭제를 의미할 수 있다.

수첩의 메모가 3일째에서 멈췄듯이 내일이 오기 전까지가 내가 되찾은 기억으로 발버둥 칠 수 있는 시간제한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티비에서는 끝없이 드라마가 나온다.

시력이 자막으로 나오는 글자까지는 볼 수가 없다.

잘 짜여진 각본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기분이 든다.

새벽시간 마지막으로 수첩에 써넣을 내용을 알아내야 한다.

언제 죽더라도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까지 시도할 것이다.

지금의 신체 상태로는 도망갈 수 없다.

아마 지금 있는 층수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잡힐 것이다.

그럼 인기척이 없는 새벽시간 수첩에서 보았듯이 누군가 접선을 시도했다면 가까운 방에 비슷하게 수용되어 있는 인간이 있다.

생각하는 사이 간호사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티비랑 꺼드릴게요 주무세요 무슨 일 있으시면 벨 누르세요 중간중간 들어와서 확인하니 혼자 있을 땐 너무 걱정하지 마시구요"


불이 전부 꺼진 방안, 닫혀버린 문틈 사이로 밖의 빛이 조금씩 세어 들어온다.

다행히 입구가 어디쪽인지는 정확히 알 수 있겠다.

하지만 가장 염려되는 것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내를 가지고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

얼마나 흐른 것일까. 잠깐의 시간마저 너무 길게 느껴진다.

간호사는 계속 오지 않는다. 아마 내가 잠들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오지 않는듯하다.

침대 아래로 발을 뻗어 일어선다. 문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귀를 가까이 대본다.

사람 몇 명이 작게 떠드거 외에는 고요하다.

복도를 돌아다니는 발자국 소리는 전혀 없다. 문을 살며시 조금 열자 많은 빛이 방으로 들어온다.

복도는 방과는 다르게 매우 밝다.

왼쪽 길로 갔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간호사들이 모여있는 카운터 같은 곳, 엘리베이터... 그럼 반대쪽에는 분명 다른 병실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문을 조심스럽게 천천히 연다.

몸이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열어 시야가 보일 정도로 고개를 조금씩 내밀어본다.

조용하다 복도에는 아무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문에서 빠져나와 오른쪽 통로를 향해 걷는다.

우측에 문이 하나 보인다.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는다.

과연 어떤 곳일지 심장이 크게 두근거린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방으로 들어간다.

천장 가운데에서 얕은 조명이 아래로 펼쳐지고 호흡기 같은 것을 끼고 있는 노인이 비스듬한 상태로 누워있다.

한발짝 한발짝 가까이 다가서자 노인은 눈을 뜨더니 나를 마주보고 호흡기 같은 기구를 떼어 입을 연다.


"누구시오? 아... 유명한 분이 오셨구려..."

"유명하다니... 나를 알고 있나요?"

"알다마다 얼마나 유명하신 분인데..."

"내가 누구죠? 여긴 뭐하는 곳이죠?"


노인은 미소를 짓더니 호흡기를 입에 대어 숨을 쉬고는 다시 뺀다.


"아무것도 모르는게 때로는 편한 법이지"

"무슨 말입니까 난 알고 싶어요 여기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때가 되면 다 아는 법입니다... 부디 건강하시기를..."


뒤쪽에서 문이 열리더니 하얀 옷의 남자 두명이 들어와 또다시 양팔을 잡고 원래 있던 방으로 돌아온다.

하얀 옷의 남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침대에 앉히더니 방을 나가고 익숙한 간호사가 들어온다.


"할아버지~ 그렇게 갑자기 돌아다니시면 위험해요"

"뭐가 위험하다는거지?"

"몸도 성치 않으신데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시려고요"

"정말 그런 거 때문이야?"

"그럼 머가 있겠어요..."

"여긴 뭐하는 곳이지?"

"병원이에요 몸이 많이 안좋으시잖아요"

"내가 몸 어디가 아프다고 여기에 가둬두는거지?"

"가두다니요~ 머리 속이 조금 아프셔서 그러지 금방 나으실 거예요"


더 이상 따지지 않는다. 같은 대화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말없이 누우려는 행동을 하자 간호사는 나를 부축여준다.


"혹시 지금이 몇시지?"

"새벽이에요 이제 주무셔야 내일 검사도 받으시죠"

"그래... 자야지..."


간호사가 얕은 조명을 켜고 방을 나간다.

손을 배게 속으로 넣어 수첩과 펜을 꺼낸다. 간호사가 다시 올 수도 있으니 잠깐의 시간을 두고 자리에 앉는다.

네번째 장을 넘겨 오늘의 내용을 추가한다.

그리고 첫번째부터 마지막의 기록까지 전부 반복해서 다시 읽어본다.


첫번째 장

[이것을 처음 본 것이라면 기억이 또다시 삭제된 것이다○○○]

두번째 장

[1일, 급격한 노화, 기억 삭제, 간호사, 또다른 노인들]

세번째 장

[2일. 탈출 시도, 문밖 1m 가량, 간호사 항시 대기]

[모르는 가족, 흥분시 진정제 투여, 기억 삭제 언제?, 나의 의심 알음, 탈출 루트 확보]

[5층 이상, 복도 간호사와 남자들, 왼쪽 길 엘리베이터, 자주 자리비움]

네번째 장

[3일, 급격한 컨디션 악화, 앉기 겨우, 다른 노인 문 밖 접선 시도, 실패]

[새벽, 하얀 남자 말 없음, 오른쪽 노인 접선 성공, 알 수 없는 대화, 때 되면 알게 된다?]


자신이 없어진다. 별다른 정보가 없다.

그렇다고 지금의 신체로는 탈출도 불가능하다.

건너편 방의 노인의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왜 놀라지도 않고 편안한 표정으로 미소를 보였을까.

나의 의심들이 괜한 짓들일까.

난 정말 늙은 노인이고 치매로 기억을 잃고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일까.

눈물이 수첩과 손에 떨어진다.

정말 내가 늙고 치매 걸린 노인이라는 것이 진실인 것만 같아서 두렵다.

치매이든 음모이든 내일 또다시 기억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 몸서리치게 공포스럽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따듯한 커피를 마셨는데.. 아직도 그녀의 향기, 살결의 느낌까지 전부 알 것만 같은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

한참을 잠들고 난 후 일어난다.

지금까지 대체 몇일이나 지난 것일까.

아주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왠지 이전의 일들이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잠든 사이에 기력이 엄청나게 떨어진건지 움직이는 행위 자체가 너무 힘들어 눈만 깜빡인다.

눈 뜬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간호사와 하얀 옷의 남자가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담당 의사입니다. 몸은 좀 어떠세요"


하얀 옷의 남자는 나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고 관절을 움직여본다.

그러더니 나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얘기한다.


"오늘은 기억이 좀 나세요?"

"무슨 기억을 얘기하는 거지?"

"며칠 전에 가족도 못알아 보셨잖아요"

"그게 내 가족들이라고?"

"가족들이죠 담에 오면 손주 손도 잡아보시고 그래야죠"

"여기는 뭐하는 곳이지..."

"요양병원이에요"

"내가... 진짜... 노인인가...?"

"이제 인정하시고 마음 편히 가지세요 그래야 건강해져서 퇴원하죠"

"퇴원이라..."

"약 드시고 편히 쉬시면 기력이 좀 나아지실거에요"


간호사가 물이든 컵과 알약을 나에게 내민다.

하얀 알약 하나를 목으로 넘긴다.

점점 정신이 몽롱해진다.

진실이란 것은 내가 늙어버린 노인인 것일까.

그저 단순히 기억을 잃어가는 요양병원에 입원한 노인인 것일까.

두려움을 느끼며 약에 취해 잠에 빠져들어 간다.



********

잠결에 정신이 몽롱하다.

가위에 눌린 듯이 몸을 움직일 수 없다.

눈을 떠보려지만 눈썹이 부르르 떨리기만 할 뿐 떠지지 못한다.

주변에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고 무언가를 치우는 듯이 여러 잡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이놈 참 대단해"

"무엇이 말입니까?"

"유일하게 끝없이 의심하는 예외 표본이라..."

"우와! 정말입니까? 그것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다니 영광인데요"

"헛소리 말고 기저귀나 갈어"

"여기 베개 밑에 수첩은 그냥 둘까요 아니면 새로 놓을까요?"

"그냥 둬"


그렇게 다시 깊은 잠이 든다.



*********

눈을 뜬다. 머리가 아프고 몸을 움직일 수 없다.

분명 어제 그녀와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의 일들이 머리 속에서 사라졌다.

팔목이 따갑다는게 느껴진다.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팔목에 검버섯 같은 점들이 군데군데 보이고 링거 바늘이 꽂아져 있다.

사고로 화상이라도 입은 것일까 손에 주름이 가득하다.

일어나려는데 허리에 아주 큰 통증이 느껴져 앉을 수 없다.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저기여! 저기여!"


간호사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이 뚜벅뚜벅 느리게 걸어온다.


"할아버지~ 깨셨어요?"

"할아버지? 내가 할아버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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