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상수첩, 아홉 번째 기록
스치듯 안녕하는 인사엔 정말이지 안녕하라는 의미는 다 사라지고 없다. 아마 수많은 안녕과 오랜 안녕으로 닳고 닳아버렸기 때문일 거다. 많은 인사치레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된 그것. 찰나지만, 스쳐 지나는 잠시나마 서로에게 누군가이기 위해, '치레'가 아닌 진짜를 나누기 위해서, 이미 그 효능을 상실한 안녕을 잠시 뒤로하고, 안동하세요, 인사를 건네본다.
닳고 닳아버린 안녕과는 다르게 오랜 시간 그 본새를 이어오고 있는 인사가 있다. 그런 말 있잖은가, 대한민국에서 식도락 여행 갈 거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을지로로 가라고. 그 수를 헤아리다 보면 하루는 고사하고 꼬박 한 달은 새야 할 만큼 맛집들이 즐비한 을지로 한가운데서도 외색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한눈 판 사이에 지나칠 수도 없을 정도로 대로변에 있어 조금이라도 신상에 이상이 생긴다면 절대 모를 수가 없는, 수십 년을 안동하게 잘 있어줘서 고마운 안동장이 있다. 안동하세요.
종업원 선생님의 기품을 보아하니 아직 나오지도 않은 탕수육에 대한 품격이 절로 느껴지는 게, 세월이라는 것이 음식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는구나라는 심오한 생각에 미칠 때 즈음, 만약 입이 있었다면 그때를 맞춰 '내가 바로 탕수육이오'를 외칠법한, 탕수육 같은 탕수육이 나왔다.
탕수육 같은 탕수육은, 정말로 탕수육 같은 게, 어느 탕수육보다도 정말 탕수육 같은 맛을 내기도 했거니와, 미묘하게 애매한 가격 정책으로 하나 더 하나 더를 외치게끔 하는, 맛과 경영이 성공적으로 결합한 우리네 탕수육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내가 넘어갔고,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갔으리라.
깐깐한 사람이라면 껍질을 깐 깐쇼새우와 안 깐 깐쇼새우 중에 깐 깐쇼새우를 안 깐 깐쇼새우보다 약깐 더 좋아할 거다. 왜냐면 안 깐 깐쇼새우는 깐 깐쇼새우와는 다르게 껍질을 까야하니까. 선조들 말씀이 음식 앞에 두고 까불면 호되게 혼난다고 했는데, 음식이 아니던가, 어쨌든 음식이던 사진이던 음식이 아니던, 선조들 말씀 틀린 거 없으니 일단 경건해지기로 한다.
새우의 크기를 대중소로 굳이 나눈다고 하면, 이 새우는 소새우라 볼 수 있다. 깐쇼 새우 소자가 이야기하던 게 새우의 크기를 이야기했던 것인지 나는 몰랐다. 그저 양인 줄로만 알았지, 새우의 크기를 이야기했던 것인지 나는 몰랐다. 몰랐다는 말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 알았다. 나는 알았다. 작은 새우가 나올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시켰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니까. 아? 내 어머니 정애는 따로 있는데? 아, 그랬구나. 실패는 내 어머니가 아니었구나. 그랬구나. 그래서 내가 성공하지 못했나 보구나. 내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됐구나.
왕오구 선생을 기억하는가. 누구한테 묻는 거지. 여하튼 말한 적이 없기 때문에 누구든 기억하는 게 이상하다. 을지로의 터줏대감으로 안동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오구오구 오구반점의 수장인데, 우리 안동장 수장님께서도 '왕'씨 성을 사용해서 그런지 지난날 오구반점에서 느꼈던, 마치 학고기로 만두를 만든다면 이렇겠다 싶은 '왕'씨 만두의 노스탤지어를 이 만두에서도 느꼈다고나 할까. 그, 살짝 육지고기의 식감이면서도 새고기의 비릿한 향이 감도는 게, '왕'씨 만두에서만 감지할 수 있는 독특한 맛을 가진다. 근데 학고기라는 게 있기는 한가?
안동장하면 굴짬뽕이지! 가 중론인 듯 하나, 노론노 노론소론노론노, 모두가 예스할 때 노! 를 외칠 수 있는 강단이 있는 자만이 승리를 쟁취하는 법.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니까. 그래서 내가 성공하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소고기송이짜장으로 어디 한번 성공을 쟁취해볼까.
일반 간짜장과 소고기송이짜장의 큰 차이는 별 차이가 없다는 거다. 이거 저거 고민하지 말고, 굴짬뽕 시키자. 귀납 무시하면 큰 코 다친다. 옛 선조 무시하면 큰 코 다친다.
안녕하지 못한 안녕은 이제 그만. 아무 일 없이 스쳐가 줘요, 할 거 아니라면 최소 안동할 수는 있어야지, 암. 오랫동안 켜켜이 쌓인 세월에도 닳아 없어지지 않고 을지로 행성이 되어버린 안동장. 리스펙 리스펙, 두 번 리스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