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인생은 새옹지마 (사진: Steam Traction Engine)
대학에서는 재료공학(Materials Science and Engineering)을 전공했다.
약 20년 전 한국의 대학들은 경쟁적으로 학부 제도를 도입했는데 내가 다녔던 학교는 공과대학 7개 학과를 하나로 묶어서 공학부라는 이름으로 학생을 모집했다. 모든 공학부 학생이 3학기 동안 동일한 필수 기초 과목 및 전공 관련 필수 선택 과목을 들은 후 자기가 가고 싶은 학과를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인기 학과는 경쟁률이 높아서 본인의 성적에 따라 1 지망 학과에 들어가지 못하고 2 지망 혹은 3 지망으로 적어낸 학과에 배정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학과가 정해지니 매우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무엇보다도 겨우 5학기만 자신의 실제 전공을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깊이 있게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처음 3학기 동안은 과 선배나 과 후배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선후배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남자들의 경우 군대 가는 시기가 애매해지는 문제도 있었다.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학교에서 학부 제도를 없애거나, 2~3개 학과 만을 묶어서 소학부 제도를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이때부터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치른 수학능력시험은 역대급 물수능이라는 오명을 얻은 수능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마지막 모의고사 점수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음에도 다른 학생들만큼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해서 상대적으로 빈곤해졌다. 그 결과 어느 날 첫 번째 합격자 발표 이후 가, 나, 다, 라군에서 지원한 모든 대학에서 떨어진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세 곳에서는 대기 번호조차 나오지 않았고 오직 한 곳에서만 대기 번호 88번이라는 놀라운 숫자를 받아 볼 수 있었다. 혹시나 하여 1차 추가 합격까지 기다려 보았지만 애석하게도 대기번호 40번까지에게만 차례가 돌아갔다. 아무리 추가 합격자 발표가 나온다고 한들 88번까지는 차례가 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날로 지하철을 타고 재수학원에 등록을 하였다.
충정로역에 위치한 그 학원에서 학원 선생님은 내 성적표를 보시더니 '그래 조금만 더 하면 되겠다. 합격!'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학원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처음 생각했던 곳과는 다른 곳에서 합격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나 자신이 쓸쓸했다. 그리고 지하철로 세 정거장만 더 가도 즐거운 한 해를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충정로역에서 멈춰야 하는 나 자신이 또 쓸쓸했다.
울적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서 수능 이후 당연히 한 번도 펴보지 않았던 수학 문제집을 다시 펼쳐보았다. 수능을 본 지 겨우 두 달 정도 지났을 뿐인데 갑자기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생각이 안 났다. 나조차 어떻게 생각이 안 날 수 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그동안 너무 놀았나 보다. 마음이 다시 쓸쓸해져서 학원 시작하면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고는 그냥 잠을 잤다.
그렇게 쓸쓸하게 하루를 보내다가 사흘 후 늦잠을 깨우는 전화를 받게 되었다. 당시 내가 지원한 대학교 근처에 살던 지인이 전화를 건 것이었는데 2차 추가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다는 것이었다(그러고 보면 당시에는 합격자를 대자보로 붙여놓았나 보다). 나는 잠결에 '그럴 리가요... 농담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그래도 속는 셈 치고 확인해 보니 정말로 내 이름이 있었다. 정말 지옥에 갔다가 돌아온 기분이었다. 당장 재수학원에 전화해서 입학급을 환급받았다.
나중에 학교에 입학해서 보니 나보다 대기 번호가 느렸던 사람은 단 한 명 만나 볼 수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나는 문을 닫고 대학에 들어갔다. 뭐 수석으로 들어가나 문 닫고 들어가나 들어가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문을 닫고 들어 간 대학에서 3학기를 보내고 전공을 선택을 하여야 했다. 원래 남들이 가는 길은 가지 말자는 것이 나의 신조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가장 인기가 있는 전자 관련 학과는 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건축이나 토목은 전혀 관심이 없으니 제외하고, 산업공학과는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으니 제외하고, 기계는 뭔가 투박하니 제외하였다. 그랬더니 남는 것은 7개 학과 중에서 항상 미달이 되고, 지원율 꼴찌를 다투는 화학공학과와 재료/금속공학부뿐이었다. 사회에 나가 보니 화학공학과나 기계공학과는 정말 쓸모가 많고 괜찮은 전공인데 우선 학부로 들어간 다음 전공을 선택하게 하니 인기가 없었던 것 같다. 이것 또한 공학부로 모집한 이후 발생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모집 단위가 공학부로 바뀐 이후 그 두 학과는 언제나 미달이 될 정도로 인기가 없다고 하니 이상하게 더욱 끌렸다. 결국 화학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니 재료/금속공학부를 1 지망으로 선택하였다. 얼마나 인기가 없었으면 대학은 문을 닫고 들어왔지만, 재료/금속공학부는 3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마침 공부를 참 안 했던 내 친구들 5명과 함께 재료/금속공학부를 다니게 되었다(사실 어머니는 아직도 남들 다 가는 전자과에 갔으면 누구누구처럼 S전자에 다니면서 돈을 많이 벌었을 거라고 하신다. 아직까지도 그런 말을 하시는 것이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전공이 결정된 이후 한 학기, 한 학기가 지나며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군대에 가기 시작했고 나도 군대에 갔다가 복학한 이후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는 교환학생 제도가 본격적으로 정착되기 전이라 영미권 학교를 제외하면 학점이 조금 낮거나 영어 실력이 부족해도 교환학생에 선발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특히 일본 학교들은 일본어 능력시험 점수를 요구하는 곳이 많았기 때문에 나에게도 기회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군대에서 틈이 나는 대로 일본어를 공부해서 전역하기 직전 JLPT 1급에 합격할 수 있었다(물론 그전에도 기초적인 수준의 일본어는 할 수 있었다).
일본의 지원 가능 학교들을 보니 도쿄, 센다이, 큐슈에 있는 학교들이 보였다. 처음에는 도쿄에 있는 학교에 지원을 할까 생각했지만 대부분의 학교의 정원이 2명이었는데 반해 큐슈대학만 정원이 5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이 학교에 지원하기로 하였다. 지원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거쳐 합격 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교환학생으로 떠나기 전에 보니 우리 학교에서 큐슈대학으로 가는 교환학생은 2명뿐이었다. 분명 정원은 5명이었을 텐데... 미달이었나 보다.
뭐 일등으로 교환학생을 가나 미달로 교환학생을 가나 가기만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일본에서의 학교 생활은 두 가지 점에서 나쁘지 않았다. 우선 군대를 다녀오느라 완전히 까먹었던 전공과목들을 완전히 새롭게 배울 수 있었다. 일본 대학교의 전공 수업은 우리나라 고등학교 수업 방식과 매우 비슷했다. 교수님은 수업 내내 칠판에 이것저것 쓰면서 수업을 하고 학생들은 그것을 그대로 공책에 필기한 후 달달 외우는 방식이었다. 사실 한국에서는 빠르고 멋진 것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내가 다녔던 재료공학부에서도 대부분 나노, 신소재, 바이오 등과 관련된 수업들만 많이 제공되었다. 심지어 내가 들어갈 때는 재료/금속공학부(90년대에 재료공학과, 금속공학과가 통합)였던 과의 이름도 어느 순간 재료공학부로 바뀌더니 나중에는 신소재 공학부가 되었다(지금은 뭐라고 불릴지 모르겠다).
그 과정에서 '금속'이라는 단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일본에서는 아직도 이 '금속'을 무지막지하게 많이 가르치고 있었다. 나중에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아직까지도 금속, 용접이 정말 중요한 분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나마 일본에서 금속에 대한 기초를 다시 들었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때 했던 공부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에서 좋았던 다른 점으로는 유도부에 들어가서 열심히 운동을 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싶다(내 무릎에 사망선고 참조).
아무튼 일본에서 1년을 보내고 돌아오니 한국에서 한 학기만 더 다니고 바로 취업을 해야 했다. 그런데 재료공학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취업처 중의 하나였던 포스코의 경우 특이하게도 상반기에 채용이 마감되어 나는 지원조차 할 기회가 없었다. 일본에서 배운 것이 금속이고, 당시에는 일본어 수준도 꽤나 향상되어 논문 정도는 여유 있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제철소에 취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긴 했다.
그런데 이런저런 채용공고를 보다가 마침 정유업체의 채용 공고를 보게 되었는데 재료공학과 출신을 채용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정유소와 재료공학과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싶었지만 아무렴 어때라고 생각을 해서 지원을 했다. 그 결과 다행히 정유소에 엔지니어로 입사를 할 수 있었고 들어가서 보니 부식, 재료 선정, 검사(Inspection) 등 재료/금속과 출신 사람이 할 일이 아주 많았다.
중간에 한 번 이직을 하면서 한국에서는 두 곳의 정유회사에서 일을 해 볼 수 있었다. 이직 이후에는 서울 본사에서 근무를 했기 때문에 매일 본사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하지만 경력으로 입사를 해서 그런지 새로운 회사에는 정이 잘 가지 않았고 언제나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중 대망의 2013년 6월, 미국 시카고로 출장을 다녀오게 되었다. 6월의 시카고는 참 좋았다. 집집마다 잔디는 푸르렀다. 그리고 상대방 회사의 엔지니어들은 회의가 다 끝나기도 전에 퇴근 시간이 되었다며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예전에 말레이시아의 정유소에서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어서 동남아시아 지역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별로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인터넷에서 캐나다의 Federal Skilled Worker Program(FSWP)라는 이민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캐나다 정부에서 지정한 직업군에 속한 경우 경력과 영어성적 등을 제출하면 캐나다에 가기 전에 영주권을 주는 프로그램이었다(지금은 꿈과 같은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캐나다에 입국을 하기도 전에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다). 해당되는 직업군을 보니 놀랍게도 와이프의 직업인 Speech Pathologist(언어치료사)가 들어있는 것이었다.
이것이다 싶었다. 바로 와이프를 꼬셔서 IELTS를 보도록 종용하였고, 와이프는 이민 신청을 위해 결혼을 하면서 그만둔 병원까지 찾아가 경력증명서에 서명도 받아와야 했다. 결국 2014년 2월, FSWP 신청에 필요한 모든 서류가 완료되어 서류를 제출하였고 놀랍게도 3개월 후 인 2014년 5월에 영주권 승인(COPR)을 받을 수 있었다. 이민 서류를 제출할 당시의 계획은 6~12개월 후에 영주권을 받으면 2015년 이후 캐나다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번 영주권 승인을 받게 되니 마음이 완전히 떠나 버렸다. 회사에 나가 일을 하고 있으면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하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그래서 계획보다 빨리 한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고 2014년 10월 27일 밴쿠버를 거쳐 에드먼튼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사실 에드먼튼에는 아는 사람도, 가 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정착지로 에드먼튼은 선택한 것은 에드먼튼 주변과 북쪽으로 정유소나 석유 관련 시설이 많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가면 어떻게든 직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정말 무모하고 겁 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캐나다에 도착하기 전인 2014년 하반기부터 이미 원유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해서 정유업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내가 도착한 2014년 10월 이후에는 원유 가격이 본격적으로 폭락하기 시작하여 어느 순간 관련 채용 공고도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에드먼튼에서 차로 8시간 정도 떨어진 사스카추완의 리자이나라는 곳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내가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들어간 곳은 정부 관련 기관으로 보일러와 압력 용기의 안전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우리나라로 친다면 가스안전공사 정도의 기관이었다. 취업에 성공했을 때부터 도대체 캐나다 경력은 단 하나도 없고 이제 막 한국에서 온 나를 왜 뽑았을까 궁금하긴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리자이나에 있는 정유소를 검사하기 위해서 정유업계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했다. 아무래도 정유소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사람의 경우 정부 기관보다 일반 기업에서 일을 하면 훨씬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나 보다.
이곳에서는 1년 6개월 정도 직장생활을 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스카추완이나 매니토바를 보고 날씨도 춥고 완전 시골이라고 폄하를 하지만 막상 살아보니 살만했다. 밥을 벌어먹고 살 직장도 있었고, 난생처음으로 '내 집'도 마련해 보았고, 이런저런 사람들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 집을 마련한 지 3개월도 안되어서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게 되었다.
2016년 봄에 회사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처음 나왔다. 그러면서 한국돈으로 약 6억 원의 적자가 예상된다고 했는데, 나는 속으로 한국의 조선소들은 적자가 1조 원도 넘는다는데 6억 가지고 무슨 호들갑이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지나자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사람을 줄일 예정이라며 그에 대한 사정을 설명하는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내가 그 자리에 참석해야 하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데 다들 설명회에 들어가면서 너는 왜 안 오냐고 해서 일단 들어가 보았다.
CEO와 HR 담당자가 나와서 현재 상황을 설명한 후 어쨌든 사람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은퇴를 할 사람은 좋은 조건으로 은퇴를 할 수 있다는, 한마디로 명예퇴직을 신청하라고 하고는 자리를 비웠다. 남은 사람들끼리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야기를 했는데 누군가 아무도 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물어봤고 노조에서 나온 사람이 만약 나가는 사람이 없으면 근속 연수(Seniority)가 낮은 사람부터 나가게 되지 않겠냐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눈이 번쩍 띄었다. 아니 여기서 제일 늦게 들어온 사람은 바로 내가 아니란 말인가? 그러고 보면 미국이나 캐나다에서는 한국과는 반대로 늦게 들어온 사람이 먼저 나가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뭔가 기분은 찜찜했지만 설마 정말 밑에서부터 내보낼까라고 생각하고는 이때 일을 잊어버렸다.
한 두 달 정도 시간이 흐른 2016년 6월. 갑자기 나의 상사였던 Chief Inspector 아저씨가 나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처음에는 당시에 진행하던 일이 있어서 그것을 논의하려나 보다 싶었다. 그래서 사무실로 찾아가 보니 Chief Inspector 아저씨는 한 명 더 들어 올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누가 들어오는 걸까 생각하고 있는데 곧 HR 담당자가 사무실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누가 말을 해 준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이 사무실에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나가라는 소리구나...
내가 그 자리에서 받은 것은 60일 해고 통지서였다. 나는 노조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단체협약에 따라 60일 전에 해고 통지를 받은 것이었다. 이것을 받고 처음 3일 동안은 잠이 오지 않았다. 집을 산 지 3개월밖에 안되어서 대출이 어마어마하게 남아 있었고, 와이프는 둘째를 임신하여 만삭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바로 잘린 것이 아니라 60일이라는 시간 동안 봉급을 받으며 이직 준비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해고 통지를 받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두 명의 엔지니어도 해고 통지를 받았는데 그들은 노조에 속해있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그 자리에서 짐을 싸고 나갔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리자이나에서 약 3,000km 떨어진 온타리오의 킹스턴에서 내가 하던 일과 동일한 일을 하는 사람을 뽑는 공고를 보았다(캐나다는 주별로 법이 다르기 때문에 각 주마다 보일러와 압력용기의 안전을 담당하는 기관이 별도로 있음). 뒤도 돌아볼 것 없이 바로 지원을 하였다. 그리고 다행히 새로운 회사에 면접을 보고 합격을 할 수 있었다.
3,000km가 넘는 거리를 이사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벌써 이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된 것도 만 4년 하고도 1개월이 지났다. 어쩌다 보니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이 만 13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오래 다니고 있는 회사가 되어 버렸다.
충정로에 있는 재수학원에 등록할 때만 하여도 내가 2차 추가로 대학에 합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학에서 전공을 선택할 때만 하여도 내가 정유회사에 취직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유회사에 취직을 할 때만 하여도 내가 캐나다에 가서 비슷한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비록 어머니가 원하셨던 전자과에 가지도 않았고, 어머니가 원하셨던 검사(檢事)나 의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캐나다에서 검사(檢査, Inspection)를 업으로 삼고 있으니 약간은 자랑스러워하실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