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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검사 Sep 20. 2020

저는 보일러와 압력용기를 검사하는 김검사입니다

그런데 보일러만 검사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정식 명칭은 영어로 Boiler and Pressure Vessel Inspector이다. 한국말로 하면 보일러/압력용기 검사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보일러'라고 한다면 다들 귀뚜라미 보일러를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한국 사람들을 만나 '저는 보일러와 압력용기를 검사하는 일을 합니다'라고 말하면 다들 집집을 돌아다니면서 보일러를 검사하러 다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참고로 한국에서 말하는 보일러는 여기서는 Tankless Water Heater라고 한다). 그래서 한 번은 '캐나다에는 집 난방을 어떻게 하나요?'라는 질문까지 받아봤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그냥 영어로 'Boiler and Pressure Vessel Inspector입니다'라고도 해봤지만 상대방에게 가장 먼저 들리는 말이 결국 '보일러'이기 때문에 반응은 이때나 저때나 똑같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저는 보일러와 압력용기를 검사하고, Nuclear 쪽 검사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 '뉴클리어'라는 말의 효과는 생각보다 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상대방은 내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듯 보이지만 더 이상 집안을 난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하는 일 가운데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원자력 발전소와 관련된 검사를 하는 것이다. 캐나다에는 3개의 원자력 발전소에 총 19기의 원자력 반응기(Nuclear Reactor)가 있다. 그중 반응기 1기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18기 모두 온타리오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온타리오의 원자력 관련 산업은 규모가 큰 편이다. 그 덕분에 내가 담당하는 구역에도 원자력 관련 설비를 제작하는 업체가 있어서 그곳에 검사를 나가야 한다. 


캐나다의 원자력 발전소는 모두 캐나다에서 개발된 CANDU(캔두) Reactor가 설치되어 있다. 이 CANDU Reactor의 원형인 NRX(National Research Experimental) Reactor는 1947년부터 처음 운전이 시작되었으니 캐나다 원자력 발전 산업의 역사는 매우 긴 편이다. 그 때문에 캐나다 사람들은 (적어도 관련 업계의 사람들은) 이 CANDU Reactor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CANDU Reactor는 중국, 아르헨티나 등에도 수출이 되었으며 심지어 한국의 월성에도 4기가 설치되어 있다. CANDU Reactor의 특징은 감속재(Moderator)로 경수(Light Water)가 아닌 중수(Heavy Water)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감속재로 중수를 이용하는 발전 방식을 가압중수로(Pressurized Heavy Water Reactor)라고 하며 CANDU는 가압중수로의 한 종류이다. 물론 캐나다에서 중수를 이용한 가압중수로가 개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광산에서 얻어지는 천연 우라늄은 대부분 우라늄-238(U-238)로 구성되어 있고 핵반응이 쉽게 발생하는 우라늄-235(U-235)은 아주 조금 들어있을 뿐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원자 폭탄의 원리는 U-235의 핵분열을 이용한 것으로, U-235가 핵분열을 하며 방출된 중성자가 다른 U-235의 핵분열을 일으키는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큰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U-235가 핵분열을 할 때 방출된 중성자를 적정한 수준으로 제어해 준다면 과도한 연쇄 반응을 억제하여 그때 얻어진 열로 발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중성자를 흡수해 주는 물질을 감속재(Moderator)라고 하며 농축 우라늄을 사용하는 발전소에서는 주로 일반적인 물(Light Water, H2O)을 감속재로 사용한다. 이 때문에 이러한 발전 방식을 가압경수로(Pressurized Water Reactor)라고 부른다.  


반면 U-235의 농도가 낮은 천연 우라늄을 이용하여 핵반응을 일으키는 경우 물을 감속재로 사용한다면 너무 많은 중성자가 흡수되어버려 지속적인 연쇄 반응이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속적인 연쇄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중성자를 조금만 흡수하는 감속재를 선택해야 하며 오직 흑연(탄소)과 중수(Heavy Water, D2O)만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감속재라고 한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우라늄 동위 원소 분리 시설을 보유하게 된 미국은 처음부터 농축된 우라늄을 이용한 원자력 발전 방식을 개발하게 된다. 반면 캐나다에는 동위 원소 분리 시설은 없었지만 같은 프로젝트를 통하여 중수를 생산하는 시설을 보유하게 된다. 또한 캐나다에는 전쟁 전부터 개발된 우라늄 광산과 우라늄 정제소가 있었다(당시에는 우라늄 광석에서 라듐을 추출. 라듐은 암 치료용으로 쓰였다는데 정말 효과가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자국 내에 우라늄 농축 시설은 없지만 중수와 우라늄을 확보할 수 있었던 캐나다에서는 처음부터 천역 우라늄과 중수를 이용한 원자력 발전소를 개발하게 된 것이다.






사실 나의 전공이나 경력이 원자력 발전소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지식은 이 정도가 전부이다. 하지만 약 4년 전 온타리오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이후에는 곧바로 원자력 발전소에 납품되는 장치나 설비를 검사해야 했다. 내가 원자력 검사를 위해서 배운 것은 미국 National Board of Boiler and Pressure Vessel Inspectors에서 실시하는 5일짜리 원자력 검사원(Nuclear Inspector) 교육이 전부였다. 


게다가 나는 혼자 제작 업체를 찾아가 검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 어깨너머로 배울 수도 없었고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내 위의 슈퍼바이저에게도 물어보기 어려웠는데, 이유는 원자력의 세계는 너무도 오묘하고 복잡하고 불투명해서 그 누구도 정확한 답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나올 때마다 코드(Code)를 찾아가면서 스스로 답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짬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난 4년간 혼자서 이것저것 찾아보고 경험이 쌓이니 어느 정도 감이 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확실히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보일러와 압력용기의 세계와는 달리 원자력의 세계는 그 누구도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누구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니 코드(Code, 주로 ASME Boiler and Pressure Vessel Code Section III와 CSA N285)만 잘 숙지하고 있어도 누구나 훌륭한 Nuclear Inspector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의 전공분야는 정유, 석유화학 분야 검사였기 때문에 처음 캐나다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아니 처음 온타리오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쪽 분야로 돌아가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는 하였다. 하지만 어느새 그쪽 분야와는 꽤나 멀어져서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할 정도이다. 그래서 이제는 정유업계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과감히 버려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아무래도 이제 내 미래는 원자력 발전에 있지 않을까 싶다.




캐나다에서 하는 일 관련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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