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서늘한 공기에 대비되 더욱 잘 느껴지는 따사로운 햇빛. 그 온기를 한가득 받으며 모든 방 창으로 쏟아지는 녹색 가득한 정원의 푸르름은 아이들에게도 마음의 편안함을 주는 듯하다.
이 집에서의 첫 주말 아침.
아이들은 정원에서 꽃을 보며 뛰어놀기도 하고, 집 안 계단 한 구석에 앉아 책에 빠지기도 하며 나른한 토요일 아침을 시작한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이게 내 꿈이었으니까.
유치원 때부터 영유를 보내 하나라도 더 앞서 가게 하려 하고, 자제하는 법을 모르는 갓난뱅이때부터 영상 미디어에 노출되 자기를 다스리는 법을 배우기 앞서 미디어 중독에 빠져 울면 유튜브를 보게 되는 것이 당연한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싶었다.
아이 교육에 욕심도 없고, 미디어도 결코 보여주지 않는 나는 고결한 척하는아웃사이더였다.
세상이 변했다고. 짧고 빠른. 그게 트렌드라고. 그런 트렌트라면 나는 자발적으로 뒤처지겠다. 세상이 미치도록 빠르고 짧다. 대기업들과 소셜미디어 기업들이 부추기는 쳇바퀴 속 가속에 모두가 경쟁과 보여주기용 과소비에놀아나고 있다. 내가 고결한 게 아니라, 정말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을 잊어가고, 그들의 가속 버튼에 놀아남에 따라 자신의 모든 걸 바치고, 심지어 자식에게까지 똑같이 강요하고 있다.
너무나도 많은 똑똑한 인재들이 단순히 훌륭한 노동자가 되기 위해 애쓰고, 그게 좌절되면 자기 전체를 부정당한 듯 실의에 빠진다. 모두가 의사가 되려 하고, 대기업에 들어가려 하고, 그것도 아니면똑똑함에도 모든 개성을 죽이고 공무원이 되려 한다. 그리고 자위한다.
"괜찮아. 비록 내가 좋아하는 일은 아니지만, 난 안정적인 미래를 얻었잖아. 그게 가장 중요하지.."라고.
그리고 왜 그토록 바라던 안정성을 얻었음에도 마음 깊은 곳이 꽈아악.. 막힌 건지 영문을 모른 채 반짝였던 그들은 휴가와 월급날만 기다리며 천천히 시들어간다.
황금의 계절 가을에 만난 좋은 날씨의 주말. 이런 날은 결코 집에 있을 수 없는 조건이다. 오늘 우리의 선택지는 '본태 박물관'이다. 건축을 잘모르는 나도 알정도로 유명한 노출 콘크리트 기법의 창시자 '안도 다다오'. 그가 설계하여 박물관 건물 자체만으로 예술적 가치가 넘친다고 들어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나는 건축도 미술도 잘 모르지만, 아름다움은 안다.
높은 고도에 위치한 박물관에서 내려다보는 뷰는 높은 하늘, 숲 그리고 저 멀리 바다와 섬. 건축의 시작은 위치이리라. 시작에서 반을 먹고가는 전망은 높은 금액의 입장료임에도 얼른 결제해 들어가 보고 싶게 마음을 가득 부풀어 오르게 한다. 고도가 높아 갑자기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입고 온 외투자락을 단단히 여미며 기대감 가득 입장을 해본다.
5개의 관으로 나누어져 건물 사이를 오가는 야외 조경부터 보통 수준이 아니다. 절제된 듯 차분한 조경과 자연의 어우러짐. 안도 다다오의 건축 철학이 건축물이 위치한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담는 것이라 들었다. 그 의도가 분명히 느껴지는 도화지 같은 건축물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예술은 자연이 한다는 듯 아주 유유히 고고함을 내뿜는다.
첫 번째 입장한 1관은 한국 전통공예 전시관으로 유물들을 위주로 전시돼 있다. 유물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듯 다음관을 기대하며 지나가는데, 깜깜한 지하벙커 같던 1관의 관람 끝에 출구 문을열자 갑자기 통창으로 자연광이 쏟아지는 레스토랑이 나타난다. 아주 먹음직스러운 냄새들에 급 허기감을 느끼며; 설계자가 의도한 데로 착실히도 음식을 주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주문 후 자리를 잡고 그제야 보이는 통창 밖 세상에 또 한 번 감탄을 참지 못한다. 아까 밖에서 보았던 하늘, 바다, 섬들이 아주 예술작품처럼 그대로 담겨있다. 건물 바로 앞에는 넓게 미끄러지는 호수가 하늘을 담은 채 고요히 흔들리고 그 사이를 하아얀 오리들이 떠있거나 물가에 나와있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결코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음식이 나오기 전에 재빨리 아이들과 함께 나가본다. 진정 그어떤 예술작품도 인공이 자연을 이길 순 없음을 느끼는 사이 아이들은 신이 나 쉬고 있는 오리들을 따라다니느라 바쁘다. 오리들은 그런 아이들이 귀찮다는 듯 엉덩이를 잔뜩 씰룩거리며 얼른 물속으로 몽땅 도망가 버린다. 곧이어 주문한 오므라이스와 돈까스가 나와 실내로 돌아간다. 음식의 비주얼도 맛도 퀄리티가 너무 높아 정말 빈틈없는본태 박물관의 수준에 연달아 감탄하며 그 멋진 곳에서 순식간에도 음식을 해치우게 된다.(금강산도 식후경이니까..;;)
이어 2관백남준의 미디어아트가 전시된 '현대 미술관'으로 입장한다. 신발을 벗는 곳이어서 아이들은 제 집 마냥 자유롭게피카소, 달리, 마티스, 앤디 워홀 등 세계 유명 거장들의 작품을 오간다. '맨발'이 주는 벗음은 범접할 수 없던 예술 세계와의 장벽을 허물고 내면 깊숙이 들어온듯한 야릇한 기분을 느끼며 작품과 더 가까워진 듯한 친밀감을 준다. 미로처럼 복잡한 복층구조의 동선을 오가는 중간에도 통창 가득 담기는 예술적인 경관과 햇살에 드리우는 창살이 만드는 그림자마저 놀라운 건축 설계의 치밀함에 지겹도록 감탄을 멈추지 못한다.
그리고 3관. 본태 박물관 전시작 중 가장 핫한 시그니쳐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관이었다. 강렬한 원색 바탕에 역시나 강렬한 대비의 검정색 점무늬 컨셉을 공통적으로 가지며, 다양한 크고 작은 전시물들이 펼쳐져있다. 유년시절 부모님으로부터 학대와 방치로 정신적인 혼란과 불안감 속에 환각증상으로 점의 무한증식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역으로 이를 표현하는 예술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렬 명료한 그녀의 작품들은 왜 현존하는 세계 대표 핫한 작가인지 알 것 같다. 그녀의 작품들은 맵고 짠 떡볶이처럼 미술을 잘 모르는 이들도 사로잡을 정도로 강렬하고 명료하다. 특히 음악, 조명과 함께 구성한 설치미술들이 굉장히 독창적이고 재미있는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암실 전시는 암실에 점을 형상화한 공들이 바닥에 한가득 하고,정면의 벽 전체를 작가 스스로가 작품을 설명하는 영상으로채워져 있는데 이상하게 곡하듯 읊조리는 그녀의 설명에 최면에 걸린 듯 멍하니 반복해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밖으로 나와 특별 전시관인 '무한 거울방'으로 밀실에 한 팀씩만 순서대로 들어가 쿠사마 야요이의 미디어 아트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대기줄이 길어 아깐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왔다. 대기하는 동안 그녀의 대표작 점무늬 호박 조형물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기다리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들어간다. 아르떼뮤지엄에서 본 적 있는 거울의 방 구조로 발밑까지 온 사방이 거울로 되어 천장에서 바닥까지 걸려있는 반짝이는 조형물들이 가득한 암실에서 노래와 조명이 흘러나온다. 무한한 점의 확장 속에 뒤덮여 자신의 소멸 즉 '몰아'의 경지를 의도한 작품으로 5분 남짓의 구성인데, 기다린 것에 비해 짧아 허무하지만 우주 속에 들어온 듯 아이들은 어두운 곳에 갇히는 것 자체만으로 매우 신나 한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자 어느새 황혼이 펼쳐져 있다. 이 시간이 주는 붉은 황금빛 색감의 분위기와 굉장했던 전시의 아쉬움을뒤로하고 하루를 마무리해 본다. 경쟁도 과시도 없는 자기 내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리고 긴 예술과 자연 속에서의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