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美)의 포위

by 킴 소여

전날 밤 저녁으로 매운 아귀찜을 집으로 포장해 왔다. 먹자마자 갑자기 복통에 설사와 구토까지 심하게 몰려왔다. 배달만 전문으로 한다며, 매장에 들어가게도 못하는 폐쇄적인 식당 구조와 직원은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중국인 직원만 있어 번역기로 주문을 받을 때부터 수상했는데.. 음식에 대체 뭘 넣은 건지, 한참 화장실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고생을 한 후에야 기진맥진해져 쓰러져 잠이 들었다.


새벽 즘 인기척에 눈을 부스스 떴을 때, 걱정스러운 남편의 얼굴이 앞에 있었다. 미지근한 손으로 배를 쓰다듬는 손이 따듯했다. 어렸을 적 아픈 나를 걱정하는 엄마의 간호가 좋아 아픈 상태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던 순간이 떠오른다. 침대에 누워서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 채, 죽을 끓이고 계시는 엄마의 뒷모습을 방 문틈으로 보던 순간이 스쳐 지나간다. 스르륵 미소를 머금곤 다시 잠든다.


다음날 아침.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햇빛의 두드림에 눈이 문을 연다. 등 뒤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남편 품 속이다. 창 밖 가득한 녹음도 햇빛의 두드림을 받았는지 온통 초록빛으로 산란했다. 시계를 보니 주말이라지만 꽤 늦잠을 잤다. 벌써 9시가 한참 넘었다. 아이들은 이미 깨어나 자기들끼리 부지런히 장난감으로 역할 놀이 중이다.


숙면으로 기운을 챙긴 나는 이불을 박차고 아침 채비를 한다. 간단히 만둣국을 끓여 네 식구가 아침을 나눠 먹고 있을 때, 거실 창 밖으로 인기척이 느껴진다.

"숲 집 이모다~~!"

아이들이 먼저 발견하고 환호한다. 그리고 옆에 낯선 남녀가 한 명씩 더 있다.


부쉬시한 쌩얼로 인사를 드리러 나갔다. 집 앞의 도자기 공방 클래스 수강생이라고 하는데, 정원을 구경하고 싶어 하여 잠깐 둘러봐도 될지 여쭤보신다. 당연히 사장님네 정원이므로 우리는 흔쾌히 승낙한다.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생기 있는 빨간 머리 앤 느낌의 붉은 끼 도는 갈색 머리의 여성 분과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개량한복에 벙거지 모자를 쓴 차분한 남자분이었다. 집주인분은 여자분이 홍대 출신의 대단한 화가로 현재도 왕성한 전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화실도 운영 중이라고 소개하신다. 남자분은 그 화실 회원으로 둘이 함께 도자기에 관심이 있어 사장님네 공방에 수업을 들으러 오신다고 한다.


나는 '오~ 그렇구나! 대단하다'며 형식적인 관심과 인사를 나누고 편하게 둘러보시기 권하며 방으로 돌아온다. 쌩얼인 무방비 상태가 부끄러운 것도 있고, 워낙에 남에게 관심이 없어서 이기도 했다. 그 아무리 대단한 대통령이 온들 나는 나와 내 사람들 이외엔 관심이 없다. 나는 먼저 주방으로 돌아와 아까 먹던 아침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데, 남편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뒤늦게 들어온다.


"자기야, 저 여자분이 대단한 현직 화가시래. 그리고 운영하는 화실도 성인들 대상으로 이론 위주가 아니라 자유롭게 수업하는 방식이래."

"오~~ 구뤠~?"

아까 들었던 이야기에 영혼 없이 대답을 했는데, 남편은 약간 상기되어 계속 이야기한다.

"그래서 내가 '아내가 평소에 그림 그리기 좋아하고, 전문적으로 한번 배워보고 싶어 했다고' 말씀드렸어. 그러니까 그림 그린 것이 있으면 한번 가지고 와보라지 뭐야~ 잘했지??"

"으응~.. 응?? 갑자기??!?"

생각지 못한 미술학원 권유에 조금 당황스러우면서도 남편 말 중 틀린 것은 없었기에 나는 부랴부랴 일기장에 끄적였던 그림들을 몇 개 찾아 건너편 도자기 공방으로 건너갔다. 이번엔 씻고 화장까지 하고서 나름 예를 갖추고선, 노크를 하고 공방에 들어갔다. 화가라는 여성분이

"아! 아까하고 많이 다르시네요~!" 하며 웃으신다.

"그림에 관심이 있으시다고 들었어요~ 한번 볼 수 있을까요?"

나는 수줍게 몇 장의 수채 색연필로 끄적인 그림들을 일기장에서 펼쳐 보여준다.

"아! 색을 참 잘 쓰시네요. 저희는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해서 입시미술과 완전히 방식이 달라요. 기초부터 시작하지 않고, 바로 그리고 싶은 것으로 먼저 시작한답니다. 그러면 그에 맞춰 그때그때 필요한 티칭이 들어가요."

설명을 듣고 더욱 마음에 든 나는

"너무 좋네요! 제가 찾던 바예요. 언제부터 등록할 수 있을까요?"

"월수금토 10시, 2시 각 2시간씩 수업을 진행하고요. 수업료에 모든 재료비가 포함되어 있어 몸만 오시면 됩니다. 편한 시간에 언제든 오셔서 한번 구경하시고, 1회 수업해 보시고 등록하셔도 돼요:)"








그 주 금요일. 공부방이 금요일은 쉬는 날이고, 아이들도 유치원에 모두 나가 한가로운 금요일. 용기를 내 그 화실을 한번 가보기로 한다. 공부방에서 10분 거리로 서귀포에서 가장 번화한 신시가지에 위치해 있었다. 건물은 화이트톤에 조금 신기한 세모형태의 외관을 취하고 있었고, 길에서 보이는 전면에 작은 텃밭은 예쁜 나무와 꽃들이 정성스레 가꾸어져 있었다.

괜히 긴장이 되 침을 꼴깍 삼키고 입구 문을 당겨 들어가 본다. 실내는 카페를 연상시키는 인테리어와 안쪽엔 카운터처럼 높은 스탠드 바 뒤편으로 커피머신들까지 놓여 있어, 그냥 그림이 많이 걸린 갤러리 카페를 온듯했다.

"안녕하세요~!"

1층에 아무도 없어 들어왔음을 알리려 일부러 큰 목소리 인사를 해본다. 그때 2층에서 사람들의 인기척과 목소리가 들린다.

"네! 내려갑니다~~"

며칠 전 집에서 들은 여자분의 목소리와 함께, 금방 얼굴을 보이고 내려온다. 여전히 생기 있는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는 그녀는 양갈래로 머리를 땋아선 간단한 프린팅이 들어간 흰색 티와 청바지를 입고 활기찬 개성을 내뿜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2층에서 수업 중이었어요. 여기서 다시 뵈니 반갑네요~"

"안녕하세요~ 화실이 너무 예뻐요! 카페인 줄 알았어요."

내 진심 어린 감탄에 여 화가분은 화실을 안내해 준다.

"하하 감사합니다. 실제로 지나가던 분들 중에 종종 카페인 줄 알고 들어오시는 분도 있었어요. 천천히 한번 둘러보세요~"


그제야 벽에 걸린 크고 작은 그림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둘러본다. 잘 그린 것만 걸어둔 거겠지만 그래도 너무 전문가 같은 작품들에 놀라던 중, 그중 특히 거대한 크기의 한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1,2층이 뚫린 높은 천장의 벽을 가득 채운 큰 나무뿌리들이 뒤엉킨 그림이었다.

절로 '우와...!' 소리가 나오며 눈을 고정하고 감탄하자

"아, 이 그림만 제가 그린 거예요. 다른 건 회원분들이 그리신 건데, 이건 지난번 제주도립미술관에 전시했던 거죠. 곶자왈에 갔을 때 찍은 사진으로 그린 건데, 숲이 너무 멋있어서 그때 그 신비로운 느낌을 담아본 거예요."

제주어로 '곶'은 숲, '자왈'은 나무 덩굴 따위가 이리저리 엉클어진 덤불을 뜻하는 말로, 지반이 굳은 용암으로 만들어진 제주 특성상 오래된 나무들은 토양이 거의 없거나 얇은 토층으로 뿌리가 땅 위로 드러나 이리저리 엉켜 덤불을 이루고 있다.

나도 곶자왈 중 가장 유명한 비자림에 가본 적이 있다. 그 깊고 짙은 숲의 신성한 포위에 감탄하며 걸었던 기억이 그림에 오버랩되었다. 그렇게 1층을 다 둘러보곤 2층으로 안내해 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시작부에 건물 중정으로 나가는 유리문이 있다. 삼각형 형태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중간이 비어 중정 형태로 만들어 두어 삼면에서 다 중정이 보이고 통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건축 구조가 너무 특이하고 멋있네요! 공간을 다 활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저렇게 중정으로 비워서 건물 전체에 여유를 주는 것 같아요! 이런 멋진 장소에 화실을 여시 다니 정말 카페 같고 아름다운 공간이에요."

내가 진심으로 공간에 대한 칭찬을 쏟아내자, 화가분은 웃으며


"감사해요. 처음에 건물 디자인할 때 고민이 많았어요. 전국에 예쁜 건물들도 보면서 봤던 건물 구조였는데 이렇게 만들어보고 싶었죠. 화실을 원래 열 생각은 없었는데, 공실로 비워두다가 비우느니 한번 해볼까 싶어 시작한 게 몇 년째 이어지고 있죠."

건물주인 줄은 몰랐던 나는 깜짝 놀라

"아! 건물주이셨던 거세요!? 와! 더 멋지시네요!ㅎㅎㅎ 원래 제주분이신 거예요~?"


서울에서 살다 예전부터 남편과 제주를 너무 좋아해 매년 제주 여행을 오다가 아예 이주를 계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곤 2층에서 한창 작업 중인 화실 회원분들과 인사시켜주신다. 그중 그때 집에서 뵌 그 남성분도 계셨다. 같은 옷은 아니지만 여전히 승복느낌의 개량한복에 벙거지모자를 쓰고 있었고, 모르는 얼굴들 사이에 아는 얼굴에 내심 반가움을 섞어 인사를 나눴다.


"어떤 그림을 그릴지 정해보셨어요~? 지난번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획일적인 방식으로 기초부터 수업하지 않아요.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은 것을 그리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기법을 옆에서 터치하며 알려주는 방식이죠."

"아,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그럼 저기 화집들도 보시면서 다른 작가의 작품을 모방해 봐도 좋고, 핸드폰 사진 중에서도 좋아요.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정해지시면 알려주세요~. 핸드폰 사진은 출력도 해드릴 수 있어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2층 작업실 한 구석에 작은 1인 티테이블에 앉았다. 그 옆에 놓인 한 칸짜리 원목 상자 안에는 자체만으로도 인테리어 소품처럼 예쁜 여러 화가들의 화집들이 자연스럽게 놓여있었다. 내려주신 커피 한 잔과 크래커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어떤 그림을 첫 작품으로 시도할지 고민해 본다. 처음의 막막함에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숨을 돌리려 한번 더 화실 공간을 천천히 훑어본다.


전체가 화이트톤 벽에 밝은 원목 마룻바닥. 세모 형태의 4층 건물 구조로 화실은 아랫변과 우변의 1,2층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랫변인 1층은 층고가 2층까지 뚫려 있고, 내부계단으로 이어진 우변인 2층은 필로티 형태로 되어있어 아래층은 외부 주차장으로 되어 있다. 길쭉하게 긴 직사각형 형태의 2층은 갤러리처럼 흰 벽을 따라 그림들이 일렬로 걸려있고, 그림에 맞게 매립등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다. 그 중앙에 놓인 긴 책상에선 회원들이 수업 중인데, 많게는 열 명 정도까지 작업을 할 수 있을 크기이다.


2층 전면 창가 구석에 있는 티테이블에 따로 앉은 채, 보통 창들보다 살짝 높은 위치에 뚫린 창을 고개 들어 바라본다. 앉은 위치에서 보이는 건 새파란 봄 하늘뿐이다. 열린 창 틈을 타고 들어오는 봄 특유의 강아지풀 같은 바람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힘들다. 높은 층고를 울리는 잔잔한 팝. 스모키 한 한 모금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리고 절제된 화이트 톤 인테리어를 수놓은 반짝이는 미술 작품들. 쾌적하고 완벽한 아름다움 속에 들어와 있는 순간이 참 이상하리만치 편안함과 흥분이 공존한다. 이런 곳에 내가 일원이 된다는 것이 살짝 전율이 퍼진다.

잠시 몇 권의 화집들을 뒤적이다 왠지 멀게 느껴지는 명작들보단 나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핸드폰 사진첩을 꺼내본다. 몇 년 치의 사진이 쌓인 방대한 앨범을 넘기다가 피로해 잠시 눈을 감아본다. '나'라는 사람을 지나갔던 너무도 많은 아름다운 순간들.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최고의 순간들을 찬찬히 되짚어본다. 머릿속으로 하나씩 추리고 추린 끝에 남은 한 순간. 그것은 '신혼여행'이었다.


신혼여행 때 예약된 일정 틀어져 갑자기 빈 하루가 있었다. 할 일이 없이 산책을 하다 발견한 작은 해변. 그곳의 평온한 아름다움과 우리의 마음이 떠오른다. 얼른 핸드폰을 다시 켜 사진첩에서 그때의 사진을 찾아 하나를 골라 화실 선생님께 출력을 요청한다.


출력된 종이를 받아 들고 나도 중앙의 큰 테이블로 가 펼쳐진 이젤에 자리를 하나 잡는다.

빈 캔버스.

점 하나 찍지 않은 이 순간.

고요하다.


아름다운 공간에서 아름다운 순간을 되짚어 표현하는 아름다움이라.

이렇게 온통 미(美)로 둘러싸인 포위에

어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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