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전 회사에서 재입사 제안을 하였다. 나는 선뜻 거절도 승낙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치열히 고민되었다. 공부방도 이제 막 학생이 늘기 시작하였지만, 여전히 개원 초반이라 수입이 생활비보다 적고, 변동성이 많은 자영업의 길이 불안했다. 고민 끝에.. 끝내 나는 승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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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이는 꿈이었다. 꿈 후반 부에 나는 이내 결정을 후회하고, 수락을 취소하였지만, 흔들린 자체가 너무 수치스럽고 후회에 가득 차 괴로워하다 꿈에서 깼다.
꿈에서 깬 아침. 꿈이라 다행이면서도, 이런 꿈을 꾼 자체가 수치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내 선택을 후회하고 있는 마음이 조금은 있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불안감. 그래.. 제주 이주 후 아무 불안 없이 즐겁기만 하다면 그건 가식이다.
방 안을 둘러보다 어딘가 느껴지는 존재감에 창 밖으로 시선을 향한다.
펑. 펑.
창밖 집 마당에선 4월의 정원이 꽃망울을 터뜨리며 '정원쇼'가 한창이었다. 흙 아래에 예쁜 꽃씨들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몸을 숙이고 있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면 몸을 들고일어나 하나씩 터뜨렸다.
펑. 펑.!
올해 가장 먼저 정원 무대를 장식한 꽃은 여리게 노오란 수선화였다. 그다음은 그렁그렁한 방울꽃, 힙한 튤립들이 차례로 무대를 채우고 나오고를 이어가다 봄 무대의 마지막을 민들레와 수국이 떼로 나와 가득 채우고 있었다.
봄에서 여름을 향해 가는 정원은 매일 하루하루가 달랐다. 어제와 다른 모습에 매일 아침을 '정원멍'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는 참 혼자 보기 아까우면서도 황홀하다. 오늘도 나른한 햇살을 맞으며 침대 위를 이리저리 뒹굴며 늦장을 부린다. 침대 머리맡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이 창문 틈 봄 내음에 희석된다.
실컷 늑장을 부리고 침실에서 나와 전 날 남은 짬뽕탕 국물을 데워 먹는다. 첫 입이 살짝 시큼하다. 쉬었나 살짝 의심이 들지만, 다른 메뉴를 고민하는 것이 귀찮아 모른 척 넘긴다. 아침을 때우고 포트기에 물을 올린다. 드립커피를 내려도 좋겠지만, 칼칼한 국물 뒤에 달달한 믹스커피가 더 당긴다. 작은 컵에 커피 분말을 털어 넣고 끓인 물을 붓는다. 창가 앞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스푼으로 커피분말을 휘이휘이 젓는다. 나도 모르게 참 골똘히도 찻잔 속을 바라보며 빙글빙글 도는 시간이 참으로 고요하다.
불과 몇 달 전. 매일 아침 사무실에 출근한 나의 첫 루틴은 텀블러를 들고 탕비실로 향하는 것이었다. 오늘 해야 할 잔뜩 밀린 업무들에 정신이 팔린 채 초조하게 스틱을 저어 대던 손. 커피 분말이 다 녹기도 전에 아침을 먹지 못한 빈 속에 부어 넣던 커피. 위벽을 긁으며 내려가던 쓰라린 단맛이 생각난다.
지금. 찻잔 속 덩어리 없이 맑게 잘 녹은 커피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한 모금 넘긴 달콤함이 분명 같은 식품회사 커피임에도 꽃에 꿀을 들이키는 듯하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선 현재의 불안정함이 회사의 안정적인 고통 속으로 돌아가길 원하고 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한 부분이다. 하지만 내면 속 더 큰 부분이 불안정한 모험으로 귀결된다. 나라는 입체적인 동물은 모험을 원하면서도 안정을 원한다. 불확실성을 회피하려는 안정 추구 심리는 전인류적으로 학습된 본능일 것이다. 그 본능을 떼어버릴 순 없다. 인정하되 잠식되지 않고, 나만의 방법을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