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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 소여 Apr 20. 2024

운명의 책 [리스본행 야간열차]

★퇴사자 필독서★

어제 이중섭 미술관 관람을 끝으로 서귀포 시내를 탐방 후 (※"07화.서귀포 시내 탐방" 참고), 아이들 하원시간에 빠듯하게 맞춰 집으로 데려왔다. 낮의 알찬 관광의 여파로 이제 좀 쉬고 싶었지만, 에너지 왕성한 아이들을 위해 리조트 수영장에서 마지막까지 힘을 짜내본다. 아이들이 행복해하며 발산하는 에너지에 반대로 힘을 얻으면서..

너희가 좋으면 엄마도 좋단다.. (쿨럭^ㅠ^)

그리고 이른 아침. 전날 과한 신체활동으로 인한 근육통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상만사 정반합의 틀 안에 있지 않겠는가. 단 걸 먹으면 짠 게 먹고 싶고, 짠 걸 먹으면 단 게 먹고 싶어 지듯이, 관광을 하고 나니 휴양을 하고 싶어지는 날. 그런 날의 비는 오히려 집콕에 감성을 더해주는 반가운 비다.


 오늘도 아이들 기상 전 독서타임으로 어제 서귀포 중앙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중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꺼내본다. 책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그 흔한 커버 뒷면의 추천글조차 무성의해 보였는오로지 느낌에 이끌려 집어온 책이었다. 이게 또 '대여'의 장점 아니겠는가. 부담 없이 책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20대까지만 해도 책을 소유하는 걸 좋아해 진정한 애독가는 책을 무조건 사서 보아야 한다는 고집이 있었다. 그런데 책 '구매'는 소유하고 계속 두고 볼 수 있어 밑줄도 편하게 그을 수 있고, 책장이 채워져 가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그만큼 책을 고를 때 더욱 신중해지고, 신중해지다 보니 실패율을 낮추기 위해 평소 좋아하던 분야만 편식하여 고르는 경향이 있었다. 반대로 '대여'는 기간 내에 다 읽어야 하는 압박과 편하게 밑줄을 그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만큼 비용이 전혀 들지 않다 보니, 책 선택에 부담이 줄어 다양한 분야를 가볍게 골라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책을 꽤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편임에도, 구매가 아니라 대여를 습관화하게 된 지가 사실 몇 년 되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신혼집에서 도보 가능 거리에 큰 도서관이 있어서 시작하게 된 대여의 매력을 뒤늦게 알게 된 이다.

어제 도서관에서 데려온 두 분

 그렇게 느낌에 이끌려 가볍게 집어온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충격적이다 못해 운명적이었다. 책 속으로 처음 노크를 하고 현관에 들어섰을 때는 음.. 뭐지 이 뻔한 신비한 느낌에 의문의 여성 등장은? 딱 봐도 미스터리 한 여성인물로 남자 주인공의 뮤즈이자 스토리 진행에 핵심 역할이겠군. 하며 식상함을 느끼며 "잘 보고 갑니다~~"하고 슥 돌아 나올까 싶을 때쯤! 미친듯한 철학관이 내 손을 확 낚아 챈다.



오늘 오전부터 제 인생을 조금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문두스('인간 백과사전' 느낌의 직장에서의 별명) 노릇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도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 테니까요. 그레고리우스는 크게 소리 내어 이렇게 말해보았다. 이 말은 옳았다. 그는 자기 인생에서 이렇듯 옳고 의미 있는 말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전화기에 대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허하면서도 장엄한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책의 주인공은 평생을 충실히 다니던 교직을 하루아침에 내려놓는다. 아침 출근길 강 아래로 투신하려던 의문의 한 여성을 저지하고, 학교로 돌아오자마자 내린 결정이다.

10년을 다니던 회사. 그리고 그 취업을 위해 준비해 온 초, , , 대학교까지 18년의 학창 시절들. 만으로 33살의 인생에서 28년을 취업을 위한 준비와 그 후의 회사 생활들로 보냈다. 그것을 버릴 때 내 감정은 사실 인생의 대부분을 날려버리는 것 같은 허무함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조건 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누구에게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들. 그리고 자신 있게 표현하지 못함으로 드는 괜한 위축감. 이런 감정들을 고스란히 언어화해 놓은 책을 준비 없이 덜컥 만나자, 체할 것 같이 매력적이었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 또한 갑작스러운 사직과 함께 만난 책 한 권에 이끌려 책 저자를 만나기 위해 낯선 리스본으로 무작정 떠나면서 여행을 지속하며 자신을 찾아가는 철학서이다. (실제로 작가 페터 비에리도 철학과 교수이다.) 주인공에게 운명적이었던 책이 내게는 이 [리스본행 야간열차] 책이 될 것 같다. 참 인생이란 재밌다. 의도한다고 의도대로 되지 않고, 계획하지 않아도 영화 속 각본 같은 우연들이 연달아 일어난다. 이렇게 내 이야기 같을 수 있을까 싶은 책을 지금 이 타이밍에 우연히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정신없이 책 속에 빨려 들어가던 중 아이들이 부스스 깨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온다. 아침으로 간단히 토마토, 스팸, 양파를 잘게 섞은 계란 스크램블을 차려준다. 다행히도 아이들이 입에 맞아하여 나 또한 작은 기쁨을 느낀다.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집으로 곧장 돌아와 남편과 나도 아침을 차린다. 아이들에게 주고 남은 스크램블과 토스트에 버터를 발라 드립커피를 내려 간단한 아침을 먹는다. 심플해서 재료 본연의 맛이 더욱 잘 느껴진다. 하나하나의 맛, 식감, 향에 집중하게 되면서 입안의 감각이 온몸의 충족감으로 퍼져간다. 통창에 식탁을 붙여 앉아 부드러운 가을비와 바람에 섞여 흔들거리는 나무와 풀잎들을 마주한다. 마침 나오는 라디오의  클래식 선곡들이 기분 탓인지 은은하게 달콤하고 신선하다고 느낄 즘, DJ 윤유선님이 촉촉한 가을비 날씨와 잘 어울리는 음악들을 선곡해 보았다고 설명한다.



새삼 지금이 너무 소중함을 또다시 느낀다.

휴가 같은 이 일상이 3개월간 계속될 거라는 편안함과 또 3개월이라는 한정된 기간에서 벌써부터 오는 불안감.

'소중함'이라는 긍정적 감정은 모순적이게도 '불안함'이라는 부정적 감정을 전제로 시작되는 것 같다.
'삶'또한 영원하지 않기에 더 소중히 내 인생을 아껴주리라 또 다짐하며

편안함과 불안함이 공존하는 희귀한 이 순간.


기분 좋은 완그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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