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잠자리에서 핸드폰은 금물-_- 새벽에 잠시 깨어나 몇 시인지 본다고 집어든 핸드폰을 시작으로 급 인터넷 쇼핑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했다.
제주 온 지 8일 차. 처음으로 7시가 넘어 기상한다. 아이들 아침식사는 대충 전날 포장한 죽집에서 나온 장조림 밑반찬을 활용하여 '장조림 버터 비빔밥'을 후다닥 차려준다. 푹푹 잘 떠먹는 동생 찬이와 다르게 첫째 율이는 깨작깨작 먹는 척만 하여 아침부터 잔소리를 듣는다.
9시 등원시간에 맞추기 위해 씻지도 않고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다음 집으로 바로 복귀한다. 가는데 40분, 오는데 40분. 벌써 살짝 지치면서 처음처럼 이 길이 막 설레지는 않지만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남조로의 도로에 사려니숲과 에코랜드 입구를 지나 구름에 희석된 햇볕이 살포시 덮이는 흐린 하늘에 적당히 시원한 날씨가 뒤늦게 눈에 들어온다. '이런 날엔 등산이나 트래킹 같은 운동을 하면 딱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 돌아가면 남편에게 말해보아야지 싶다. 그러다 문득, 전날 작은 다툼이 있어 서늘한 상태인 게 떠오르면서 내가 먼저 제안하는 건 조금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 아닌가에 대한 저울질을 하다 어느새 집에 도착한다.
부부는 부부인가. 남편이 먼저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근데 자기는 오늘 올레길 한 코스를 정주행 할 계획이니, '개인플레이!!'를 하잔다;;;; 그 말에 속도 없이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덥썩
"오~ 나도 오늘 트래킹 할랬는데 같이 가면 되겠네!"
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온다. 자존심이 한 발 늦었다..
남편도 당황했는지
"아;; 어.. 나는 내 코스가 너무 장거리라 네가 힘들까 봐 혼자 가려고 했지. 같이 가도 되겠다."
라고 그렇게 우리는 급작스러운 올레행 파티를 맺는다.
오늘의 코스는 '올레길 20코스'!! (김녕항-세화해수욕장 코스)
시작점인 김녕해수욕장으로 가는 내내 근데 진짜 아침도 안 먹고 시작하냐고 내가 계속 물어대는 통에, 남편은 김녕해수욕장 주차장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근처에서 간단히 먹기로 합의한다.
그렇게 거리도 가깝고, 속이 편할 것 같은 백반 정식집을 대충 택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우럭 전문점이어서 주인의 반강매에 우럭정식을 시키게 되었다. 허름한 식당 시설에 큰 기대 없는 상태에서 음식이 나오자 '간단히 먹을랬는데 양이 너무 많다'며 투덜거리며 떠먹은 첫 입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먹기 바빴고, 그냥 '맛있다'는 감탄이 첫 술부터 마지막 숟가락까지 처음 말하는 것처럼 툭툭 저절로 튀어나왔다.
우럭이라는 생선이 크게 친숙하지도 않고, 예전에 웨이팅까지 하며 먹었던 유명 우럭집은 간이 쌔고 조미료맛만 강하여 크게 실망한 적이 있었다. 먼저 온 옆테이블 손님들 말대로 '유명한 집보다 더 맛있었다.'
코다리처럼 우럭을 살짝 말린 후 겉은 튀긴 방식으로 겉은 바삭, 안은 쫄깃하면서 동시에 부드러웠고, 양념 방식이 독특하게도 아삭하게 양념에 볶은 양파를 위에 잔뜩 뿌려 생선 본연의 맛을 그대로 둔 채 양념된 양파와 함께 곁들여 간을 맞추었다. 가장 고난이도인 '간은 안 쌘데 감칠맛 나는' 엄청난 맛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본래 목적인 올레길 순례는 시작도 전에 과하게 배를 든든히 채우고 올레길에 드디어 올랐다.
인생 첫 올레길에 괜히 설레고, 새로 산 운동복 개시에 더욱 업되어 괜히 입구 매점에서 생존 식량으로 초코바도 하나 사본다. (트레킹 내내 과도한 맛집 탐방으로 결국 뜯을 일은 없었지만;)
잔뜩 두툼해진 구름 덕에 햇볕은 피부에 부드럽게 내려앉는 날.
부는 듯 안부는 듯 미세한 바람은 신선한 바다 내음을 계속 코로 데려오다가
문득문득 지인한 라일락류의 향 뭉치를 코에 펑 던져와 깜짝 놀라 주변을 살피면,
진한 향기의 주인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작고 수수한 들꽃들이 새초롬히 흐트러져 있다.
거기다 두말하면 입 아플 제주의 해안 풍경은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섬 전체 특유의 로맨틱 색감에 누가 내 눈에 필름 필터를 꽂아놨나 착각이 들 정도다. 이런 오감적 유희를 맘껏 즐기며 오르는 트레킹길은 발걸음이 날아다니는 듯하다.
인생 첫 올레길은 예상한 것과 달랐다. 원래 혼자 걷기를 좋아하는 남편과 달리, 사실 운동이라곤 즐겨하지 않던 저질 체력인 나는 제주여행을 여러번 오는 동안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혼자 짐작으론 육지의 흔한 공원 산책로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둘레길을 조성해 우레탄 지면 또는 나무 데크류가 잘 깔려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정말 올레길에 대해 1도 몰라서 가능했던 생각이었다. 제주시, 섬 전체를 도는 코스라면 거리도 엄청날뿐더러, 애초에 올레길은 없던 걸 새로 인위적으로 만드는 컨셉이 아니었다.
원래 있던 제주의 길들을 살려, 해안길, 농촌 길, 마을 길, 도로 위 측면길, 때론 길이 아닌 바위나 모래사장도 가리지 않고, 골고루 있는 그대로의 제주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일종의 '추천 로드맵'이었다.
오히려 너무 예쁘려고 힘주고 치장된 모습이 아니라, 태생 미인의 순수한 쌩얼을 다양한 날 것의 모습으로 보여주어 더욱 매력적이었다.
보통 접했던 공원, 호수, 해안 등의 산책로들은 대게 코스가 길든 짧든 걷는 내내 보이는 경치가 각도만 다르지 대상은 같다. 그러나 올레길은 베스킨라빈스 패밀리팩처럼 여러가지 맛을 골라 볼 수 있는 종합세트였다.
처음 김녕해수욕장에서 시작한 코스는 아무리 예쁜 해안길인들 계속 보다 보니 슬슬 감흥이 덜해질 즈음,
갑자기 시골 밭길이 등장한다.
먹어만 봤지 키워본 적은 없는 당근들이 대량 묻혀있는 당근밭의 잎사귀들 향연을 보며 당근 풀이 저렇게 귀여운지 처음 알게 되며 한번 슥슥 쓰다듬어 보다가 또 슬슬 밭뷰가 단조롭게 느껴질 즘,
해안도로 위 풍력발전기들이 등장해 웅장한 스케일로 천천히 위엄 있게 회전하는 모습에 묘하게 최면에 걸린 듯 빠져들다가 그것도 슬슬 감흥이 떨어질 즈음,
해안가에 신상 대형카페가 등장하면서부터 점점 내 목적은 '운동과 관광'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어머~ 이런 멋진 신상 카페가 마침 여기 있네~~ 목말랐는데 잘됐다ㅎㅎㅎ 잠깐 목 축이고 가자!"
하며 들어가 멋진 인테리어와 뷰에 사진 찍느라 눈이 잠시 돌아갔다가
다시 정신을 애써 붙잡고 조금 걷다 보니 제주 젊은이들의 성지 '월정리 해수욕장'이 등장한다.
'탁-!'
이때부터 정신줄이 끊기며 휘황찬란한 볼거리들에 바로 관광 모드로 전환된다.
서핑 클래스가 왕성한 월정리♥︎
"어머~~~~ 저런 귀여운 소품샵은 못 참지~~~"
"어머~~~~~ 안 그래도 서핑해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서핑샵이 이렇게 많네~ 시장조사 살짝 해볼까??"
남편은.. 도대체 올레길은 반도 안 돌았는데 돈이 왜이렇게 많이 드냐며 다시는 나랑 안 오겠다고 한다.
저런 가게들은 그냥 지나치는 게 더 손해 아닌가
- -??
그렇게 배도 안고픈데 외관이 힙하다며 피자집까지 기어코 들어가 먹고서야 아이들 하원시간 임박에 첫 올레길 순행은 급 종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