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허기

by 은조

나는 패션, 쇼핑, 트렌드에 관심이 많다. 주로 유튜브, 인스타로 요즘 트렌드를 찾아보고 무신사, 지그재그, 29cm 와 같은 쇼핑몰에서 윈도쇼핑을 곁들인 결제를 한다. 분명 5년 전까지만 해도 보세 브랜드는 가격이 3만 원을 잘 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뒤에 0 하나가 더 붙었다. 20대 초, 사회초년생 월급 주제에도 감히 모험을 즐길 수 있었는데 재직 10년 차에 다다르는 지금 오히려 안전한 선택만 하게 된다. 물론 선택을 한다고 해서 나의 통장이 열리는 일은 더더욱 줄어들었다.

- 아, 그 시절 모험이 그립다.



요즘은 초등학생 때부터 화장을 한다고 하지만 라떼는 백탁 있는 선크림도 용납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까지 얼굴에 색이 존재하는 그 무엇도 발라보지 않았고 대학 입학을 앞두고서야 비비크림부터 하나씩 사모으기 시작했다. 문제는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마치 지난 10대 동안 못한 화장 질량을 보존하려는 듯이 화장품을 무지하게 모으기 시작했다. 유튜브를 보면서 따라 하고 또 좋다는 건 나한테 맞는지 아닌지 생각도 안 하고 모두 사들였다.(그땐 아리따움, 에뛰드, 미샤 같은 로드샵 제품이 엄청 저렴했다.) 화장대 서랍은 1+1 행사마다 드래곤볼 모으듯이 수집했던 섀도우들로 가득 찼고 어울리지도 않는 컬러여서 한 두 번 바르다만 립스틱이 쌓여갔다.



그러다 회사를 이직하면서 화장도 잘 안 하고 꾸밈 정도가 수수한 분위기인 팀에 들어가게 됐다. 나에게 화장은 자기만족의 영역에 가까웠지만 환경이 더 큰 영향이 있었는지 점점 화장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쓰던 색조만 쓰게 됐다. 어느 날 매일 색조를 바꿔 바르고 꾸며서 출근하는 게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철없고 고급스럽지 못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건 속에 파묻혀 사는 게 스트레스로 느껴졌고 깨끗하게 정리된 환경에서 더 큰 희열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당시 화장품을 정리할 때 최근 한 달 이내 쓰지 않았던 건 모두 미련 없이 버렸다. 버리면서 아깝다는 생각보다 홀가분한 기분이 드는 건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박하사탕을 살짝 물고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같이- 시원했다.




다시 현재. 요즘은 화장품 보다 의류와 가방에 관심이 쏠려있다. 이상하게 딱 서른이 넘으니 폴로, 타미힐피거, 라코스테 같은 브랜드 옷에 눈을 뜨게 되더란다. 서른이면 명품백 몇 개는 있어야지- 하는 말에 귀가 펄럭이기도 하고 자꾸 찾아보니 알고리즘이 블랙홀같이 끌어들인다. 유혹에 넘어가는 나 자신이 싫을 때가 많아 미니멀하게 사는 사람들의 의지와 마음가짐이 정말 부럽다. 무엇이 나를 계속 물건을 사게 할까? 무엇이 나를 허기지게 하는 걸까? 이건 필시 마음가짐의 문제다. 자꾸 ‘사면 안돼, 돈 쓰면 안 돼’ 스스로 옥죄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다른 한쪽으론 ‘왜 안돼? 내가 힘들게 번 돈으로 이 정도도 못사?’ 하는 생각이 들어버린다. 그리고 그 나쁜 생각이 주로 승리한다.



7년째 만나는 짝꿍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 결혼 준비 비용도 만만치 않은데 가장 큰 건 신혼집이다. 둘 다 부모님께 손 벌리고 싶지 않아 둘 힘으로 준비하고 있는데 당장 구할 건 아니지만 큰 금액을 모아야 된다는 부담감이 크다. 태어나 해외여행은 오사카 한 번 가본 게 다인데 여행도 가고 싶고 주말 데이트를 하면 근사한 곳에서 밥도 먹고 싶다. 기념일엔 뮤지컬이나 공연도 보고 싶고 서로에게 좋은 선물도 주고받고 싶다. 하지만 양가 부모님 허락 하에 같이 살며 외식 1번 할 돈으로 장 보면 몇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지 계산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보단 집 앞 테이크아웃 매장에서 사 집에서 넷플릭스 보며 쉬는 게 대부분이다. 돈을 한 군데로 모아 함께 준비하다 보니 연애할 때 여행 비용이 1인이 아니라 2배로 느껴져 엄두가 잘 나지 않는다. 아, 물론 이런 생활이 싫은 건 아니고 그럴 능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만든 규율에서 잘 벗어나지 못하는 성향 탓이다.



그런데 마음이 조금 달라진 계기가 있다. 어느 정도는 지금 즐기지 못하면 안 되겠구나. 건강검진 후 좋지 않은 결과를 듣고 대학병원 진료를 앞두니 아무도 내게 강요한 적 없지만, 아니 나 스스로 강요한 거지만 별로 즐기며 살아본 적 없는 내가 조금 불쌍해졌다.


매일은 아니어도 맛있는 음식도 먹고


문화생활도 하고 운동도 배워보고 그럴 수 있잖아.


여행도 젊을 때 가야지.


물건보다 경험에 행복했던 건 분명한데.


최근에 내가 언제, 뭘 하며 행복했지…?



그래서 나를 좀 더 알아가기 위해, 그리고 더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끝없이 채우는 것은 허기를 채우지 못한다. 오히려 비움으로서 채울 수 있다.


혼자 담고 있던 생각과 마음을 비우고 싶은데

쌓아놓고 방치해 뒀던 날을 반성하며 익명의 힘을 빌려 비워보기로 했다.


- 이제 허기를 채울 수 있을까?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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