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경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이런 경우는 스팸이나 광고 전화가 대부분이라 바로 거절하는데 이상하게 구글링을 해보고 싶더라. ‘00 병원’이네, 촉도 좋아라.
- “안녕하세요. 00 병원 ARS 서비스입니다. 예약 확인을 위한 안내 전화로…”
내가 맞냐는 질문에 ‘네’ 한 번, 예약일에 올 수 있냐는 질문에 ‘네’ 한 번. 그 두 마디로 오늘 하루 기분이 다시 바닥으로 추락했다. 억지로 잊어버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노력했던 게 물거품이 된 듯했다. 차라리 빨리 뭐라도 진단을 받고 싶다. 언제나 기다림은 지옥이다.
한편으론 이번 건강검진을 받고 결과가 좋진 않지만 (아직까진) 바로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려 애쓴다. 참 신기한 게, 회사 복지로 매년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매번 유방 초음파, 유방촬영은 검진 당일 취소했다. 그런데 이번엔 이상하게도 그냥 받아보자 싶었다. 아무 증상도 없었고 ‘그냥 받아보지 뭐’ 하는 생각으로 받아본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이렇게 사태가 커질 줄이야. 만에 하나 추가 진료 후 안 좋은 진단을 받아도 당장에 죽진 않을 정도니 오히려 다행인 건가, 아니 오히려 좋은 건가 싶기도 하다.
이번 일로 마음이 꺾이면서 직장 생활에 대한 마인드에도 큰일이 났다. 아니면 그동안 내 마음을 스스로 모른 척 해왔을지도 모르겠다. 번아웃이 왔다. 주말엔 아침 6시 반에 눈을 떠도 개운한데 출근하는 날은 7시까지 미적거려도 하루 종일 커피 없인 버티기가 너무 힘들다. 분명 사람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거나 담당하는 업무에 차질이 있는 게 아닌데 그냥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게 너무 싫다. 그냥.. 그냥 다 그만두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그럴 때마다 한평생 공백 없이 직장생활을 해오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버티는데, 요즘은 정말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버텨내는’ 중이다.
나는 천성이 고요한 사람이다. 소리에 민감해서 시끄러운 곳에 가면 신이 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운이 바닥나고 행동이나 생각이 빠르질 못해 몸과 마음을 가만-히 두는 것을 좋아한다. 요즘 기업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큰 기업들도 휘청거릴까 걱정하는 시기여서 그런지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도 매년 구조조정 소문이 돌곤 했다. 다니는 회사마다 인수합병이 되는 것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내 자리가 정리된 적도 있었기에 소문은 내게 생계를 위협하는 소리로만 들렸다. 매일 불안감 속에서 미래를 걱정하고 업무는 업무대로 고민하면서 많이 지쳤나 보다. 매일 고요한 호수에 돌 던져지듯 사니 내 천성을 거스르고 억지로 적응하며 내가 아닌 상태로 살아가는 기분이다.
현실적인 고민들을 다 제쳐두고 그냥 조용한 시골에 내려가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 몇 시 인지도 모르게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당연히 지금의 내겐 불가능한 얘기지만 젊은 날의 내겐 내가 내 뜻대로 쓸 수 있는 평일이란 없겠구나 라는 생각에 미치자 너무 허망했다.
"매일 아침 해가 뜨면 그 햇살에 자연스레 눈을 뜨고 싶다. 그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신 후 커피 한 잔과 사과 반쪽을 아침으로 먹는다. 먹는 동안은 그저 창 밖을 바라본다. 어제 자기 전 읽다 만 책을 읽고 오전엔 가고 싶었던 전시회를 보러 간다. 역시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관람객이 그리 많지 않아 여유롭게 볼 수 있다. 오랜만에 다른 동네에 간 김에 근처 맛집을 검색해 가본다...."
평범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지금의 난 가질 수 없는 하루다. 하루라도 젊을 때 이 여유와 행복을 느끼고 싶은데 불가능한 현실이 더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래서 더더욱 직장에서 도망치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어쩌겠어, 먹고살아야지, 버텨야지. 나는 요즘 지금의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 여기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을지 도전해보고 있는 중이다.
- 무엇을 통해 내가 일상 속에서 활력을 찾고 무기력할 때마다 짚고 일어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