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 와중에 영어 공부에 더 깊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당시 시드니에서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있었지만, 기초가 부족했던 나는 문법과 스피킹 위주의 틀에 짜인 수업만 듣고 있었다. 또 같은 레벨의 반 동생들도 프리토킹 시간에 매일 하는 말만 하고 더 이상 진전도 없고, 그놈의 안부는 토킹 파트너가 바뀔 때마다 왜 이렇게들 물어보는지... 서로 안부만 묻고 "오늘 학교 끝나면 뭐 할 거냐?" 이런 거만 묻다가 수업 끝나고, 이런 일이 몇 개월 반복 되다 보니 영어 실력은 제자리걸음이었고, 아무리 공부해도 별다른 진전이 없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이렇게 해서 언제 영어가 늘지?' 고민 끝에 영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보기로 했다. 보통 외국에서 영어 실력을 키우려면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거나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손님들과 대화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유교사상이 뼛속까지 박힌 고지식한 아재라서, 일하며 시간을 버리는 것보다는 한 글자라도 더 공부하는 게 낫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공부해 왔던 그 버릇을 못 버린 거지..... 그래서 지금 영어 한마디 하기도 어려우면서......)
그러던 중, 길을 걷다가 호주 원어민들(Australian Native Speakers)이 잔뜩 모여 있는 곳을 발견했다. 바로 시드니 타운홀 역 근처였다. 거기에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20명이 넘는 홈리스들이 각자의 구역을 만들어 놓고, 질서를 유지하며 노숙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바로 저 사람들이다!' 내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음료수 하나와 빵 하나의 뇌물(?)로 영어 무식자를 회생시켜 보자!
나는 곧장 타운홀 앞에 있는 울월스 슈퍼마켓으로 달려가 $1.90짜리 콜라 한 캔과 $1.60짜리 초코빵을 구입했다. 참고로 당시 내 생활비는 100% 한국에서 아내가 보내주는 돈으로 충당하고 있었고, 최대한 아껴 써야 했다.
내 주식은 아침, 점심, 저녁 모두 $1.99짜리 홈브랜드 식빵과 $1.99 홈브랜드 딸기잼 그리고 $2 짜리 물에 희석해서 먹는 과일향 주스였다. (참고로 이 식빵 한 줄과 주스 한 병이면 5일을 버틸 수 있었고, 그렇게 3개월 이상을 생활했으며, 그때 질리게 먹었던 이유로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식빵은 절대 안 먹는다.)
그런 내가 홈리스를 위해 $3.50를 쓰는 것은 엄청난 사치였다. 심지어 나중엔 내 옆에서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내가 뺏어먹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 하지만 꾹 참고, 내가 평소 지나가며 자주 보던 홈리스 중 한 명을 찾아갔다.
40대 중반인 그의 이름은 제임스!!!. 솔직히 처음엔 두려웠다. '이 사람이 나한테 해코지를 하면 어쩌지?' '괜히 지갑이라도 털리는 거 아냐?' 하는 걱정이 먼저 앞섰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콜라와 빵을 건네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Can you give me some time to talk please?" 그러자 그는 '뭔 이런 정신없는 아시안 녀석이 있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What?" "What is it?" 하며 그 역시도 나에게 조심스레 대답했고, 우린 그렇게 처음대화의 장을 열었다.
그런데... "잭팟!!!!" 이게 웬일인가? 처음부터 내게 너무나 친절한 제임스! 영어가 서툰 나를 위해 천천히 말해 주고, 잘 모르겠다고 하면 다시 말해주고, 틀린 발음과 억양까지 호주식 영어로 교정해 주는 것은 물론, 호주에서 생활하는 팁까지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이건 완전 개인 영어 선생님이네! ㅋㅋㅋ
그렇게 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 몇 시간씩 제임스와 대화를 나눴다. 때로는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길에서 선잠도 자며 영어 원어민과 대화하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제임스는 타운홀 역 근처에서 볼 수 없었다. '내가 너무 귀찮게 했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2006년 당시 시드니 시티 카운실에서는 노숙자들을 위한 숙박 시설을 늘리며, 사회적 지원을 점차 확대해 왔고. 이러한 노력은 노숙자들이 거리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노숙자 대책반을 운영하며, 노숙자들의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 제임스도 지원을 받고 안정을 찾았던 노숙자 중의 한 명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덕분에 내 영어 실력은 몇 개월 만에 몰라보게 향상되었고, 나는 영어 공부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때 제임스가 했던 말 중 기억에 남는 말이 있어서 잠시 적어본다.
홈리스들이 호주에 유학온 학생들보다 더 부자라는 사실... 그 이유는 센터링크에서 Fortnightly (2주마다)로 받는 실업급여, 청년 일자리 수당, 장애수당, 긴급재정 지원 등등 복지혜택으로 받는 돈이 적게는 $400부터 많게는 $750까지 받고, 이들이 선택한 직업(?) 홈리스의 삶은
집 렌트비로 내야 하는 돈이 너무 아까워서, 구속되지 않은 프리한 삶을 살고 싶어서, 일 안 해도 정부에서 먹고살게는 해주는데 굳이 일을 해야 하나? 등등 많은 이유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