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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 Jan 31. 2021

"아침에 할 일 해, 애긴 내가 볼게"

저...정말!?

아침에 여유롭게 밥을 먹고 있으면 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다.

아침 느즈막이 일어나 식빵을 굽고 아침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요즘 식구들이 갓 구운 식빵에 맛을 들여 매일 아침 혹은 점심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식빵을 구워 결 따라 찢어먹으며 끼니를 때우고 있다. 오늘 아침도 별반 다를 것 없이 식빵을 먹으며 얼어 죽어도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이라는 절개를 지키며 여유롭게 아침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일은 월요일이니 일요일 아침의 게으름은 언제나 오케이다.


"아침에 할 일 해, 봄인 내가 볼게"


그렇게 여유를 부리며 누텔라를 바를지 딸기잼을 바를지 고민하며 숟가락을 들었을 때 남편이 쭈뼛 말을 꺼냈다. 정말? 정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정말이야?"


남편은 가정적이고 자상한 사람이다. 게임도 하지 않고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대표적 모범적인 남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가장 친한 친구 이름을 대라면 내 이름을 꺼낼 만큼 친구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만큼 약속이 별로 없고 회식도 매번 도망쳐나오는 가정적인 사람으로 치자면 최고의 남편인 셈이다. 아기를 낳고 나서는 나와 남편은 더욱 집순이와 집돌이가 되었다. 한 없이 집으로 파고 들며 둘이서 고군분투 아기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남편은 운동을 정말 좋아한다. 나와 남편은 야구를 좋아해서 할 얘기가 많았다. 서로의 팀을 욕하고 비하하고 폄하하며 친해졌다. 나는 과거에 스포츠 기사 쓰는 일을 했는데, 편협적으로 쏠려 있던 내 생각이 가끔은 남편으로 인해 중화되기도 하며 다양한 시선으로 경기를 관람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어렸을 적에 야구 선수로 뛰어 본 경험이 있었고, 현재도 사회인 야구를 즐겨하며 유일하게 사회생활, 취미생활을 하는 게 야구였기 때문에 집에만 있던 남편이 운동을 하는 건 나에게 참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야구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 그렇다고 축구처럼 사람만 채워지면 공 하나 가지고 열렬하게 운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야구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을 빌려야 하고, 플레이를 하는 9명 외에도 후보선수가 대기하고 있어야 하고, 야구배트며 글러브며 공에 헬맷까지 고루 다 갖춰져야만이 경기를 진행할 수 있다. 게다가 추운 겨울에는 부상의 정도가 매우 심하기 때문에 마음 졸일 일도 많다. 무엇보다 한 달에 한 두번 있을까 말까 하는 경기마저 겨울에는 아예 없다.


꽤 운동신경이 좋은 남편은 몸이 근질거렸는지 테니스로 눈을 돌렸다. 남편은 나와 봄이 친정에 한 달 정도 요양을 가러 간 사이  테니스 수업을 결제해서 일주일 중 5일을 테니스를 치러 갔다. 하나에 빠지면 뽕을 뽑아야 하는 성격이 제대로 발휘되었던 모양이다. 본인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재미가 있었는지, 흠뻑 빠졌다. 그만큼 테니스 실력도 솜이 물을 흡수하듯 날로 늘어갔다. 나와 봄이 집으로 돌아와서는 견딜 수가 없어 온 몸을 긁어대며 테니스장으로 나가고 싶어했다.

나는 봄이를 재우고 집에서 요가를 한다. 나도 요가원 가고 싶은데..ㅠㅠ

처음엔 그게 정말 스트레스였다. 그렇게 남편이 나가면 온전히 아기를 혼자서 봐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오기 전에는 집도 좁아서 집에만 있는 것이 더 힘들 때였다. 게다가 나는 일년에 두 번 친구를 만나는게 전부였다. 그래도 친구를 만나는 것보다는 아기를 내가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기 때문에 약속을 잡지 않았다. 아니, 잡을 생각 조차 하지 못했다. 약속을 잡는다는 건 큰 죄악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지내는데, 일주일에 몇 번이고 테니스를 치러 나가겠다는 남편이 처음엔 정말 야속하고 얄미웠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기분좋게 "다녀와~" 했더니 무려 5시간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봄인 낮잠도 자고 점심도 먹고 저녁도 먹고 한참을 놀다가 그제야 잠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야 남편이 들어왔다. 화가 났다. 속이 탔다. 나는 누군가 밖을 나가면 굳이 연락을 하지 않는 타입이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생각이 바탕에 있는 사람이라 꼭 연락을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굳이 연락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남편은 속편하게 그 긴 시간을 열심히 테니스를 치다 돌아왔다.


당연히 나는 성질이 매우 곤두 서 있었다. 내가 기꺼이 다녀오세요! 했으면 눈치껏 두 세시간 정도 안으로는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닌가. 나라고 나가고 싶지 않아서 안 나가나, 내 옷장엔 옷이 한 가득에 신발은 지네 열 마리 수준으로 켜켜이 쌓여 있는데 도대체가 입고 신어본 기억이 없다. 나갈 일이 없어서 입고 신을 수가 없다. 옷을 그렇게 좋아하고 신발을 그렇게 좋아하는 나도 꾹 참고 집에만 있는데, 다녀오라는 한 마디에 그렇게 대책없이 연락도 없이 테니스만 주구장창 치고 오는 모습에 화가 났다.


그래도 내가 "하지마!!!!"라고 화를 낼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간 남편은 많은 것을 내려 놓고 가정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테니스마저 치지 못하면 지금의 내가 느끼는 기분을 고스란히, 두 배 세 배 느끼고는 절망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 화가 풀린 것은 아니라서 "나는 두시간이면 될 줄 알았지. 그래도 5시간은 좀 너무한거 아니야?"라고 말 하는 것에서 그쳤다. 남편은 정말로 대역죄인의 표정과 모습으로 석고대죄를 할 태세였으나 그럴 시간 없으니 빨리 씻고 집좀 치워줘. 로 끝났다.


그 뒤로도 나는 테니스에 대해서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대신 남편은 눈치를 보며 약속을 조금씩 줄이고 주말에 한 번, 평일에 한 번정도 나가는 것으로 약속을 하고 둘은 적정선을 지키며 남편의 취미생활 시간을 지켜줬다. 대신 남편은 집안일을 더욱 열심히 하고 내가 집안을 좀 어질러 놓거나 대충 살고 있어도 크게 요동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 것으로 서로의 감정을 케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나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남편이 이번에 부서 이동을 하게 되면서 골프와 관련한 직무를 맡게 된 것이다. 골프라는 스포츠는 내 기준 정적이고 너무 느려서 관심이 없던 스포츠인데, 어쨌든 관련한 일을 하게 됐으니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남편은 골프 채널을 보거나 골프 서적을 보는 것으로 어떻게든 채워보려 했지만 관심과 흥미가 없으니 지식만으로는 좀처럼 상식이나 지식이 늘지 않았고, 이윽고 골프 레슨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선 모양이었다.


그 말은 즉, 테니스와 골프를 하러 매주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하루에도 봄이를 보느라 30분씩 쪼개며 니가 봐, 내가 볼게 하며 주거니 받거니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집에 있는 시간을 모두 운동을 하러 가면 나는 집에서 숨 돌릴 시간 조차 없는 상황이 돼 버리는 것이다. 남편의 "골프레슨을 받아야겠어" 라는 한 마디에 "그럼 이제 테니스도 치고 골프도 치러 가나는거야?"라는 말 한마디가 잠시의 공백도 없이 무조건반사로 바로 튀어 나왔다. 남편은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아..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좀 해보려고..." 라고 말을 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좋게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적어도 "당분간은 테니스는 접어두고 골프레슨을 받으려고"라는 말을 꺼내는 정성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골프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라 억지로 하는 거라서 테니스를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지만 뭐 어쩌랴. 테니스를 쳐야 골프때문에 쌓인 스트레스까지 다 풀 수 있다는데.


나는 말을 줄이고 눈을 감고 잠을 잤다. 내가 뭐라든 골프와 테니스 둘 다 하는건 변하지 않는 사실인 것 같아 그냥 빨리 잠이나 자고 내일 애기나 보자. 내일은 남편이 테니스를 4시간이나 치고 나머지 한시간동안 골프레슨을 등록하러 가기 때문에 하루종일 봄이랑 둘이서 붙어 있어야 한다. 체력이나 비축하자. 하는 심정이었다. 그럼 나는? 나는 언제 쉬어? 나는 언제 나가? 새해가 돼서도 밖으로 나간건 시댁과 마트가 전부였다. 한 번도 봄이가 떨어져서 나 혼자 외출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굳이 새해가 아니라 작년을 세어 봐도 열손가락에 꼽는다. 하지만 그런 말은 집어 넣었다. 말 해봐야 대책이 없기 떄문이다.


그런 아침, 식빵을 한참 뜯는데 남편이 말했다.


"아침에 할 일 해, 애긴 내가 볼게."


생각지도 못한 남편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응 나 오후 내내 나가있잖아. 아침에 할 일 해. 어제도 봄이 재우느라 할 일도 못하고 잤잖아"


원래 같았으면 아니야, 괜찮아. 같이 보자. 했을텐데 도저히 그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나는 새해 들어서 나만의 약속으로 아무도 보지 않는 글이라도 꾸준하게 글을 올리는 걸 목표로 하고 있었다. 시간을 쪼개고 잠을 쪼개서 어떻게든 글이란 걸 써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제와 같은 날엔 봄이 보채고, 잠을 안 자는 통에 내 모든 걸 내려놓고 하루 종일 봄이에게 붙어 있었다. 키보드 한 번 만져보지 못한 날이었다.


그걸 알았던 남편은 기꺼이 말을 꺼냈다. 오전엔 할 일 해. 애긴 내가 볼게.

사실 별거 아닌 말처럼 보일지 몰라도 굉장히 큰 위로의 말이었다. 내 생각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더니, 아니지 눈치도 보고 미안해하기도 하니까 안중에는 있지만 어떻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말이 맞겠다. 아무튼간 나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해주기 위해 내가 어떤걸 해주면 좋을까 스스로 생각했다는 점이 큰 감동이었다. 어떤 화려한 선물도 아니고 대단한 약속도 아니지만 자신이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게 뭔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창고로 가는 길 옆 공간을 내 방으로 만들었다. 유일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다. 1평도 안 되는 크기지만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좋은 남편이라서 싸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싸움의 질이 상당히 좋아진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도 내가 한 번 참으면 상대도 내가 참는 동안 자신만의 생각을 통해 더 나은 방법을 찾고 있는구나, 하는 감사함을 느끼기도 한다. 살면서 앞으로도 다양한 이유로 싸우고 힘들 일이 많겠지만, 이런 순간순간의 어려움을 바탕으로 더 어려운 일들을 극복하기 위한 계단을 쌓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무런 싸움 없다가 커다란 싸움을 하면 교도소 담벼락을 쳐다보는 것처럼 넘을 수 없는 것이라고 느껴지겠지만, 그간 자잘하게 싸워온 이력과 그간 참아온 내공, 또 그 사이에 깨달지혜와 각종 노하우들이 여러 칸의 계단이 되어 총총 걸어 올라 담을 넘을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아직은 만 2년, 햇수로 4년차인 초보 부부지만 가끔은 화가 나고 가끔은 측은하고 또 가끔은 이해하기도 하면서 우리만의 룰을 만들어 가고 또 우리만의 이해의 폭을 넓혀 쫀쫀한 가정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


남편이 아침에 할일 해, 라는 말에 감동을 받아 구구 절절 쓰고 나니 고해성사가 돼 버렸다. 여유롭게 커피도 마시고 뉴스도 보려고 했더니 이제 점심을 하러 가야한다. 아름답게 포장해봐야 주부는 주부다. 내 시간 돌리도.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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