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권태감이 예상되오니 조속히 설렘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정신없던 가을학기가 끝나고 새해가 밝았다. 사실 기말고사를 앞두고 지독한 감기에 걸렸었는데, 미국에서는 항생제 성분이 든 감기약을 사려면 반드시 의사 처방전이 있어야만 했다. 병원에 갈 시간이 없어 아마존에서 주문한 진통제성 감기약으로 감기 증세를 억누르며 기말고사를 겨우 치렀다. 그리고 일주일이 넘게 계속 골골거렸는데, 순전히 내 면역력으로 바이러스가 제거되기까지의 기간이 이 정도이구나를 몸소 실험하는 시간이었다.
감기뿐만 아니라 이곳의 날씨가 나를 집에 머물게 했는데, 여러 날씨 매체들에서는 이를 이상기후의 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이곳에 오래 사셨던 분들도 이렇게 비가 많이 온 적은 없었다고 말해주었다. 기온은 10도 안팎으로 그리 낮진 않으나 우리나라 장마철처럼 거의 한 달이 되도록 비가 퍼붓다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특성상 바람이 많이 불어 비가 가로로 주로 내리다 보니 뚜벅이로 집 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 반강제적으로 집에서 방학을 보내기 시작하였는데, 종종 허공을 보고 당황스러워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이제 막 정년퇴임을 하고 갈 곳을 잃은 우리 아버지들처럼, 쓰임을 다하고 버려진 퇴역 경주마처럼. 사실 이곳에 온 목적의 큰 축이 '쉼'이었는데, 미국과 유학생활, 이 모든 게 처음이다 보니 내가 인지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었나 보다. 이제야 온전한 휴식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막상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몰라 나의 동공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일단 몸 컨디션을 회복하고자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졌다. 약 먹고, 자고, 먹고. 몸은 점점 회복했지만, 그 틈을 지루함이 어느새 채우고 있었다. 나 자신에게 여유를 주는 것이 하나의 목표였지만, 권태로운 여유는 나를 충전시켜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번 기회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활기참과 충만함을 유지하려면 설렘이 늘 기저에 깔려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국에 오기 직전 나의 팀장님은 많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훨씬 눈이 반짝이는 분이셨다. 늘 재밌는 거 머 없나 두리번거리며 정말 다양한 방면으로 활동과 기여를 하고 계셨다. 그리고 은퇴 후 삶이 너무나 기대된다고도 하셨는데, 돈과 무관하게 그저 내가 어떻게 세상에 좀 더 긍정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떠올려본다면 할 것들은 무궁무진하다고 덧붙이셨다. 냉소적이고 방어적인 나와 비교했을 때 어쩌면 감정의 나이는 팀장님이 더 어릴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었다.
나는 애늙은이라는 말을 종종 들으며 자랐는데, 이런 말을 듣는 데에는 현실적인 상황과 예상되는 결과를 바탕으로 과감한 도전을 하지 않고 어느 정도의 확실한 성과가 보장되는 길로만 가려는 내 성향이 한몫했을 것이다. 돌다리를 두드리다 못해 아예 강을 콘크리트로 덮어버려야 비로소 건너곤 했다. 이런 내 태도는 어느새 남아있던 모든 물줄기들을 메마르게 해 버렸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도 설렘이란 감정을 외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뚜렷한 성과가 예상되지 않는다면 그 선택지에 대한 일말의 호기심과 이끌림을 나도 모르게 없애버림으로써 스스로를 노잼루트로 등 떠밀고 있었을지도. 이런 점에서 볼 때 인생의 권태감은 설렘의 부재함에 기인한다.
결과와 성과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시작과 과정만을 떠올려보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조금씩 앞으로의 과업들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성적만을 생각했을 때 봄학기의 많은 숙제와 과제를 또 언제 다 하나 걱정이 앞섰었다. 그런데 수업 자체만을 떠올려보니 꽤나 재밌겠단 느낌이 들었다. 교수님은 어떤 분 일지 궁금했고, 이 수업들을 통해 또 어떤 새로운 걸 알게 될까 기대되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것들도 생겨났다. 주변에서 그렇게 방학 때 여행 다녀야지 얘기를 들을 땐 전혀 내키지 않았고, 의무감에 여행지를 물색할 땐 그렇게 재미가 없더니, 문득 비가 이렇게 오고 우울한 날씨가 지속되자 영화 '만추'가 떠올랐다. 그리고 불현듯 이 영화의 배경장소인 시애틀에 가보고 싶어졌다. 비가 많이 오는 비수기라 그런지 국내선 요금이 많이 저렴했다. 그래서 바로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이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시애틀에서 가볼 곳들을 천천히 찾아보게 됐다.
여러 수업들과 강연회에서 줄곧 AI 시대에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으로 '호기심'이 종종 일컬어졌다. 그리고 초대강연자 중 한 분은 그 호기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연 내 생각이 정답인지 반문하고, 내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이를 꼭 AI와의 경쟁에서 인간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보기보다는, 스스로의 정신적 젊음을 유지하기 위함으로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은 결국 세상을 향해, 그리고 나 스스로에 대해 설렘을 가지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니 말이다.
정말 많은 일들과 변화로 가득했던 2025년이 가고 2026년이 시작된 지금, 올 한 해는 설렘으로 가득 찬 시간으로 보내보고자 한다. 인생이 무의미하고 모든 게 귀찮고 하기 싫어질 땐 설렘주의보를 발령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