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도 어언 3년 차. 우리 모두가 잔뼈가 굵을 대로 굵었다고 자부하기엔 코로나는 아직 정복되지 않은 전장이다. 익숙해질 법하면 델타, 오미크론 같은 새로운 신무기들을 예고 없이 들고 나온다. 복불복도 심하다. 심한 사람, 덜한 사람이 있는 반면 안 걸리는 사람도 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공통점은 있다. 어느 누구든 확진자가 되면 평범한 일상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입원이라는 병원 생활도 그런 점에서 비슷하다. 내가 영위하던 평범한 삶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여기에 대유행병인 코로나가 더해지면 어떨까? 한 번 뒤틀린 일상이 또 한 번 틀어진다. 때문에 두 번째 난관을 마주했을 때는 기어코 속이 울렁거리고 말았다.
두 번째, 24시간 마스크 착용
우리는 모두 집 바깥으로 나서는 순간부터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한다. 의무이기에 당연하다. 대신 집 안에서는 (내가 동거인이 있는 확진자가 아닌 이상) 벗어도 된다. 온종일 마스크에 지쳤을 몸과 마음에 숨 돌릴 틈을 줄 수 있다. 속 편히 들이마시고 의식 없이 내쉰다.
그런데 이런 당연한 일상조차 코로나 시국의 입원 병동에서는 예외이다. 이곳에서는 24시간 마스크를 착용해야만 한다. 병실은 집과 달리 안팎이 없기 때문이다. 타인들과 끊임없이 접촉해야만 하는, 건물 벽으로 둘러싸인 '바깥'만 있을 뿐이다. 집이나 입원 병동이나 먹고 자는 건 똑같은데 자유의 범위가 다르다. 개인의 자유보다 서로의 안전, 모두의 안전이 우선시된다. 병동은 환자와 보호자뿐만 아니라 의료진과 다양한 직원들이 공존하는 곳이다. 밤에도 2시간 간격으로 간호 선생님들이 찾아오신다. 체온, 혈압부터 혈당, 산소 포화도 등 기본적으로 체크할게 셀 수 없이 많다. 간호체계가 낮밤 없이 3교대로 돌아가는 이유가 있다. 특히 수술 직후에 밤새 환자를 처치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저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두 걸음이 채 되지 않는 환자 침대와 보호자 침대의 간격 사이에서 그들은 매일 한결같이 열과 성의를 다했다. 머리가 커서 보니 더 멋지고 존경스러웠다. 이런 분들이 계속 안전하게 근무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24시간 마스크 착용은 필수였다.
병원에 있는 모든 사람과 이뤄지는 모든 행위들이 다 생명을 치료하고 살리는 목적을 가진다. 보호자로서 금기사항을 숙지하는 것 또한 이 거대한 업에 포함된다.
물론 바로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보호자로서 입원 첫날밤,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잘 때조차 마스크를 껴야 한다니. 밤새 익숙해지느라 애를 먹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마스크를 살짝 벗고 잘까 고민도 해봤다. 그러다 이내 꾹 참았다. 행여나 코로나에 걸려서 엄마가 수술도 못 받으면 어쩌지 싶은두려움이 확 끼쳤다. 그게 제일 겁났다. 아니면 만일 수술 끝나고 엄마는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내가 확진되어서 옆에 없으면 어떡하지. 그것도 무서웠다. 혹시나 하는 우려가 실제가 될까 봐. 불편함을 어떻게든 견뎌내야만 했다.
첫날밤의 고비를 한번 넘기니 이튿날부터는 큰 어려움 없이 마스크를 쓰고 잠에 들 수 있었다. 입원 전부터 쌓인 고단함이 준 특효약과 코로나의 두려움 덕이 컸다.
입원한 지 6일째 되던 날, 마침내 엄마는 무사히 수술을 마치셨다. 그때까지의 엄마와 나의 3차례 코로나 검사들도 모두 음성이었다. 거기다 엄마는 수술 후 기존의 병실로 돌아오셨다. 이것은우리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수술 전날 중환자실 동의서를 미리 썼을 만큼 큰 수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입원 전 진료 때도 중환자실에서의 회복이 기정사실이었다. 허나 교수님께서 최대한 혈관을 절제하지 않으면서 종양을 떼내려고 노력하셨다. 딱 달라붙어 있어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가. 그렇게 종양은 깨끗이 제거됐고 엄마는 일반 병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너무나 감사하고 감사했다. 이제는 회복만이 남았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수술한 날을 0일로 잡았을 때 그로부터 이틀째 아침이었다. 귓가에 음성 하나가 들렸다. 옆자리 보호자가 양성이라는 소식이었다. 그날은 입원한지 꼭 일주일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