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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SHOOP 리슙 Mar 27. 2022

지금, 코로나 시국의 입원 병동 - 1

 첫 번째 난관




현재 나는 상주 보호자이다. 3월 중순 이래로 쭉 입원 병동에 머무르고 있다. 보호 대상자는 사랑하는 나의 엄마. 때마침 기막힌 타이밍으로 내가 퇴사를 했던 터라 보호자 역할을 자청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만다행이다. 지금 여기서 내가 맞닥뜨리는 상황들을 다른 가족이 직면하면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기 때문이다. 원래 입원 자체도 만만치 않은데 코로나까지 덮쳤으니 오죽하겠는가. 산책 좋아하는 아빠였다면 되려 병이 났을지도 모른다.

수년 전에도 삼촌이 동일한 병원에 입원하셔서 몇 번 오간 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어느 정도는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그때와 지금은 너무나 판이했고 코로나가 병원에 던져놓은 새로운 난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 입원 전 pcr 검사



입원 당일날 병원을 못 들어가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pcr검사 결과가 '양성'이면 절대 불가하다. 그간 아무리 힘들게 외래 진료를 받으러 다니고 수술 날짜를 잡아서 복잡 다난한 필수 검사들까지 모두 치렀을지라도 말이다. 예외는 없다. 연기하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다. 기한도 엄격하다. 오직 하루 전, 이틀 전에 받은 pcr검사의 '음성' 결과만 허용한다. 나머지 검사들(신속항원검사 등)은 모두 불허한다. 



나도 그래서 얼마나 피가 말렸는지 모른다. 엄마의 경우는 간과 부신 가까이 대정맥을 누르고 있는 4.5cm 정도의 종양이 있었다. 하루빨리 수술이 시급했다. 맨 처음 소개받은 신장 이식 선생님이 4월 말밖에 시간이 안된다고 직접 간이식 선생님을 연결해주실 정도였다. 그렇게 몇 번에 걸쳐 간신히 한 달 하고도 보름을 당겨 잡은 수술이었다. 더군다나 소위 말하는 '빅 5' 병원 중 하나였기에 환자도 예약도 터져 나갔다. 그러니 만에 하나 수술이 미뤄지면 언제가 될 지도 알 수 없었다.



러므로 입원하기 보름 전부터 나의 중대한 임무는 '무조건 오미크론 안 걸리기'였다. 인터넷으로 오미크론 증상을 열심히 찾아보며 경계 태세를 바짝 갖췄다. 평소보다 일부러 더 예민하고 민감해졌다. 그러다 보니 목이 조금만 아파도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미열감이 느껴져도 마찬가지였다. 건강염려증을 가진 사람처럼 수시로 약을 먹어대야 겨우 안심이 됐다. (아마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은 약을 복용한 최단기간이 아닐까 싶다). 현관문 밖을 나가는 순간부터는 끊임없이 손소독제를 발랐다. 자동문의 열림 버튼, 엘리베이터 층 버튼, 각종 손잡이 등을 맨손으로 잡지 않으려고 버텼다. 대신 팔꿈치 같은 다른 신체부위들을 이용했고 정 안되면 옷소매를 힘껏 끌어올려 손잡이를 잡았다. 대중교통이용하다 머리를 닿은 날에는 반드시 감고 잤. 외식도 일절 금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그렇게 하고 지냈다. 하루 확진자가 60만 명까지 치솟는 나날들이 이어졌으니까. 다른 법이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절박한 자율 방어 말고.

결과적으로 엄마와 나는 '음성'이었. 정말 다행이었다. 덕분에 예정된 날짜에 입원 수속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간의 노력과 기도들이 이뤄진 듯했다.  마치 게임 시작부터 어려운 퀘스트 하나를  깬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병동 생활 한번에 깰 수 있는 퀘스트 달랐다. 오로지 퇴원해야만 벗어날 수 있는 난관들 연속이었. 나는 수시로 내 적응력과 인내심을 끌어올려야만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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