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통을 만들어야 할 글들은 차고 넘치는데 여즉 못했다. 다 머리만 대롱대롱 달려있다.브런치 서랍장과 네이버 메모장, 다이어리 등 여기저기에 널려있다.
원래는 버스와택시를 타고 가는 시간을 이용해 틈틈이 글을 썼는데 요즘 통 그러지 못했다. 체력이 떨어졌는지안구에 노화가 왔는지차 안에서 폰만 보려 하면 토기가 올라왔다.
그래서 요즘은 눈꺼풀 안쪽만보고 간다.얇은 살갗 하나 덮였다고 현실에서 반 발짝 멀어진다. 장면들이펼쳐진다. 해야 할 일은 어차피 눈 떠도 그대로일 테니 눈꺼풀 안쪽에서는 하고 싶은 상상만한다. 지금 당장 할필요 없는 일들만. 그러다 불쑥 앙상한 토막글이의도와 상관없이훅 떠오른다.자책감이 든다. 예전 글('여름의 형용사, 글쓰기')에 글쓰기의 고마움을 얘기하며 배은망덕 운운했는데 또 저버렸다.글에 대한 은혜는글로 갚아야 한다. 손톱만큼의 양심으로2022년 마지막날 몇 자 끄적여본다.
한 때는 여러 일들을 동시에칼같이 해내던멀티태스킹 능력이 자랑스러웠다.무조건 열심히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초과 근무를하며 성과를 만들어내고,모두를 충족시켜야제대로 인생을 사는 것 같았다.퇴사하고 나서도 변함없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손발을 가만히 두거나 멍을 때리는자신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됐다. 하루가 쉴 틈 없이 돌아가야만, 기진맥진 일해야만열심히 산 것 같아 안심됐다. 짧은 이동 시간에 글을 쓰던 것도 그런 이유가 컸다.글을 안 쓰면 강박적으로 강연이나 동기부여 영상을 뒤적이고 캡처를 했다.대체 누가 쫓아온다고 그렇게 쫓기듯이 했을까. 자기 계발에 열중하는 나에게 취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건강하지 못한습관이었다.
최근에서야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 중이다.매일 달리지 않는다고 내존재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다.그리고 삶에는 열심히 할 게 '돈 버는 일', '자기계발' 말고도 많다. 15분 이상 밥 먹기나 하루 7시간 이상 자기, 안부 연락,멍 때리기, 좋아하는 책 읽기등도 열심히 해야 할 일들이다. 마음과 체력, 생산적인 일과 비생산적인 일 둘 모두를 가치 있게 다뤄야 한다. 균형이 중요하다.
퇴사한 지 어느덧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내 흐름은 어떤가 돌아본다. 직장인일 때는 회사의 흐름을따라가야 했지만 회사 밖을 나온 독립된직업인은 알아서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더 이상 타인이 정해준 목표를 향해 정신없이, 쫓기듯 달음박 치지 않는다. 똑바로 고개를 들고 계속 질문하며 길을 찾아나간다. 한 번씩 멈춰 서서 멀리 보고,고치고, 다듬어 나간다.아직내 흐름은 비포장도로에 가깝다. 불안정하고, 예측불허의 사건이종종 터진다.그래도헤쳐나가는 몸과 마음은 훨씬 자유롭고 여유롭다. 의지와 책임감의 뿌리도 남다르다. 더 굵고 깊다. 길을 걸어가는 스스로가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굳이 멀티태스킹 능력을 발휘해 성과를 증명해내야 하는 피곤함도 없다.
여담이지만 요즘은 멀티태스킹보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집중하는 게더어렵게 느껴진다.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집어들어 여기저기 들락날락하고 싶은 충동을참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버스에서는당연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괜찮다고 되뇌며다시 마음을 고쳐먹는다.편하게눈을 감는다. 스스로에게 지운 죄책감과 불안감에서 벗어난다. 글에게 은혜 갚는 일은 다른 날, 다른 데에서 하기로 한다. 창가로 스며드는정오 햇빛이 눈가에 어룽거린다. 피부에도 전해진다.고양이가 되는 상상을 한다. 버스에서만큼은 고양이가 되고 싶다. 몸을 한껏 웅숭그리고 햇볕 아래 낮잠을 자는 고양이 한 마리. 고양이는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잔다.잠이 올 때는 잠에만 집중한다. 나도 그렇게 한 순간에 하나만 집중한다. 눈꺼풀이 덮이면 상상하기. 토막글도언젠가 몸통이 달릴 것이다,이 글처럼, 평평한 땅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