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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몽 Oct 04. 2023

페인트칠을 하면서 한 생각들

한달동안 매주 제주도에 오고 가다.

페인트칠


 지금 생각해봐도, 그 때 집을 사자마자 어떻게 그렇게 모든 식구들이 일정을 맞추어서 제주도에 방문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렸다.


원래 나 혼자 하려고 생각했었던 집 외벽 페인트칠을, 오빠, 사촌동생, 아버지 이렇게 넷이서 함께 했다.

페인트칠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어서, 대충 이틀 정도면 다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집이 작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꼬박 8일 정도는 걸린 것 같다.


페인트칠을 하는 기간 내내 제주도에 있을 수는 없었어서, 주말마다 비행기 티켓을 사서 제주도에 갔다.

수요일은 석가탄신일이 있어서 이틀 휴가를 내어 또 4일을 다녀오기도 했다.

비가 오면 작업을 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도 페인트칠을 하려고 했던 날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았다.


작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달리, 집 외부의 모든 면에 꼼꼼하게 적어도 3-4회는 붓질(또는 롤러질)을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해야하는 일이었다. 밑작업으로 페인트가 깔끔하게 칠해지도록 마스킹 테이프를 붙이는 일도 해야한다. 또  페인트가 적당히 마르기를 몇시간 기다리기도 해야해서 마음처럼 진행이 빨리 빨리 되지는 않았다.


혼자서 했으면 한달 내내 시간을 쪼개어 페인트칠만 하고 나가떨어졌을 것 같다.

다행히 밑작업과 바탕칠, 1회 페인트칠은 식구들과 함께 했다.




페인트칠은 매일 매일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장사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일이라, 내가 봐도 집이 후져 보이면 아무도 안 올 것 같아서,

덧칠을 여러번 해서 색이 산뜻하고 깔끔하게 나오게 하려고 욕심이 자꾸 났다.




솔직히 몸은 힘들어도 재미있었다.


살면서 몸을 쓰는 육체노동을 별로 해보지 않았어서, 멍하니 계속 팔을 움직여가면서, 희끗희끗 울퉁불퉁한 면을 깔끔하게 한개의 색깔로 착실하게 바꾸어 나가는 작업이 재미있었다.


한번 시작하면, 붓을 내려놓고 밥을 먹기도 귀찮았다.


내가 생각한, 이쪽 면을 다 칠할 때까지는 실제로 끼니도 한번씩 걸러가면서 계속해서 붓질을 했다.

사방이 지저분하고, 손에는 붓이 들려있어서 작업 중엔 핸드폰을 확인하기도 어려워 더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하염없이 벽에 색을 칠하고 있으면,

한낮의 쨍쨍한 햇살이 어느새 약해지고, 바람이 불다가, 불그스름하게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이때부턴 마음이 급하다.

오늘은 꼭 끝내고 싶었는데,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금세 깜깜해지기 때문이다.

가로등도 띄엄띄엄 있는 시골이라, 밤이 되면 사방이 캄캄해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도시에서는 야근이 일상인데 말이다.


좀처럼 계획한 시일 내로 작업이 끝나지 않자, 점점 마음이 급해졌다.

나중엔 충분한 작업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해가뜨는 시각에 눈을 떠서(대략 6시쯤) 밖으로 나와 페인트통을 꺼내게 되었다.


농사 짓는 사람들이 왜 새벽부터 일을 하는지, 왜 밤에는 일찍 자는지 실감나게 깨닫게 되었다.


태양이 내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받기 시작했다.

태양이 뜨고, 비가 오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있었다.




 제주도에 집을 사서 내려온지도 거의 3주가 지났다.

나는 아직도 집 앞의 해변조차 가보지 못하고, 집 페인트칠하는데 매달려 있었다.


 몇 년에 한번씩 놀러왔던 제주도에

 이렇게 자주 와보기도 처음이고,

 이렇게 와서 바다도 못보기도 처음이었다.


그래도 하고, 또 했다.





처음으로 식구들이 그리워졌던 날


 어느 주말엔, 처음으로 나 혼자서만 제주도에 내려갔다.

 매주 아이들에 부모님까지 모두 오고가는 게 힘들기도 하고, 비행기표 비용도 많이 들어서이다.


 그 때는 혼자 집을 벗어나기만 해도 육아에서 해방되어 없던 힘도 솟아올랐다.

 활기차게 혼자 비행기를 타고, 차를 타고 달려, 다시 제주집에 도착했다.


 집에 잘 넣어둔 페인트칠 도구를 모두 꺼내어, 혼자서 붓질을 시작했다.

 바람이 정말 많이 불었다.

 

어김 없이 또 시간은 흘러 노을이 지고, 세상은 붉은 빛으로 변했다가 점점 어둑어둑해져갔다.  

나는 아직 저녁도 못 먹었는데, 아직도 칠해야 할 벽면이 두개 정도 남아있었다.


지난 번에 왔을 때, 아버지와 함께 외벽 전구를 설치했어서 이젠 밤에도 외벽의 불을 켜면 그럭저럭 마당이 환해졌다.


밤이 되었지만, 외벽의 불을 켜고 계획했던 페인트칠을 이어갔다.

그 곳은 밤이 되면, 정말로 온 사방이 새카맣게 변한다.


혼자서, 저 멀리부터 바람이 불어오는 캄캄한 공간에, 사다리까지 놓고 올라가 벽에 손을 높이 뻗어서 계속 붓질을 했다.  


사다리 위에 올라가 있으면 캄캄한 시공간이 더 넓게 느껴진다.

넓고 검은 공간에 익숙하지 않을 때여서 겁이 나고, 무서웠다.


혼잣말로 "힘내자. 이것만 더 하자!" "괜찮아!" 외쳐가면서 계속 붓질을 했다.

혹시라도 여기서 떨어져 다치면 아무도 모를 것이기 때문에, 다리를 덜덜 떨면서도 손으로 벽 모서리를 꼭 붙잡고 붓질을 했다.



다행히도 외벽의 얼룩덜룩한 부분이 모두 없어지도록 칠을 마쳤고, 밤 9시 30분, 드디어 집에 들어와서 옷을 다 벗고 샤워를 했다.


집의 벽이 얇고, 창문도 한장이고, 강한 바람소리에 집 전체가 휭휭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 밖으로는 깊고 넓은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어둠이 바로 창문 밖에 와있었다.


수년동안 늘 식구들과 북적거리는 환경에서 살아서 언제나 고독을 꿈꿔왔었는데,

그 날은 약간 살이 시리도록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식구들과 정말 멀리 떨어진 느낌이었다.

내가 정말 멀리까지 왔구나.


휭휭 바람소리라도 좀 덜 들리라고 TV를 켰고 평소에 한번도 보지 않던 홈쇼핑 채널을 틀었다.  


쉴새없이 떠드는 사람소리가 그리울 줄이야...

나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낳고, 정말이지 처음으로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살아서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부모님까지 보고 싶었다.

그렇게 홈쇼핑 채널을 틀어둔 채, 이불을 깊게 덮고 잠이 들었다.





바람이 살랑


그 무렵 개인적으로는 매우 큰 사건이 벌어졌다.


간단히 말해, 원래 살고 있던 집에 가처분 소송이 들어왔다.

내 집을 몇년 전에 사서 식구들과 잘 살고 있었는데, 전의 전 전 쯤의 소유자가 소유권이전등기청구를 한 것이다. 과거의 거래가 무효였다고 하면서 말이다.


 매우 어렵게 내가 가진 모든 돈을 탈탈 털고 빚을 내면서 산 집이었고,

 그 집에 엄청나게 큰 애착을 느끼고 있었던 터여서 그 무렵의 나는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전남편과 헤어진 후, 새로 사랑할 대상을 "내 집"으로 삼았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의 덧없음에 깊은 공허함을 느끼고, 앞으로 절대로 변하지 않을 무언가를 찾다가 "부"동산을 소유하기로 마음 먹었었다.

집은, 땅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쨋든 평생 동안 내가 팔지만 않고, 망하지만 않으면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집의 소유권이 뿌리에서부터 흔들리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출퇴근을 반복했고,  제주도에 내려가서 페인트칠을 했다.

 현재의 법 제도 아래에서 소송에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낮았다.


 내 전재산인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나마, 이런 일이 터지기 전에 제주도에 작은 집을 산 것이 조금이나마 충격 완화 역할을 해주었다.

제주도의 집을 생각하면 마음이 약간 안정되었고, 또 이 쪽에 신경쓰다보면 원래 집의 일이 잠시 잊혀지기도 했다.


그래도 매일매일 절망적인 생각은 늘 머릿속에서 나를 쫓아왔다.  



그 날도 하루종일 페인트칠을 했다.

5월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점점 날씨도 따뜻해지고, 하늘이 참 맑았다.


페인트칠은 이제 거의 막바지 작업에 접어들었다.  

점점 깔끔해지고 예뻐지는 집을 보면서 힘이 났다.



오후 3시쯤 되었을까.

사다리에 올라가 집의 외벽을 칠하고 있는데, 아주 따듯하고 포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살랑~ 내 몸을 어루만져 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묘하게도

'그래.. 그 집 날려도, 나 할 수 있어.

까짓거 그 돈 다시 벌면 돼.

안 되면 여기서 살면 돼.

결국 할 수 있어.'

라는 대책 없이 긍정적인 마음이 핑 솟아올랐다.


집에 소송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알게 된 이후, 내내 무거웠던 마음이 왜인지 처음으로 살짝 가벼워졌다.

상황이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스스로도 무척 신기한 기분이 들어서

바람이 부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역시 하늘도, 구름도, 햇살까지 조용하게 아름다웠다.


그 동안 그 어떤 긍정적인 마음을 먹으려고 해도 되지 않았는데,

직접 내 피부에 닿은 바람이 나를 쓰다듬어 준 것만 같았다.



나는 무신론자에 가깝지만, 그 날 그 바람은..

바람이 나를 만져줘서 내 마음이 순간적으로 가벼워진 그 느낌은

신의 손길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정말로 이상하게도 그 뒤로는 어느 정도 가벼워진 마음으로 지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마음이 무거워질 땐, 그 날 제주도 집의 마당에서 살랑 불어오던 바람을 늘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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