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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몽 Sep 18. 2023

단 하나의 화살을 날리다.

제주집을 사버렸다.

대출심사를 기다리며


매수를 결정하고, 마지막 남은 산은 대출 통과였다.

그 당시 내가 융통할 수 있는 자금은 딱 집의 가격만큼이었고, 그 돈을 집 사는 데 다 쓰고 나면 빈털터리가 될 예정이었다. 그래서는 이후 하고자 하는 일도 못하고, 당장 다음 달의 생활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다행히 중개인이 제주도 소재의 은행까지 소개해주어 대출 상담까지 받고 제주공항으로 향했다.

구두로는 아마 가능할 거라 했지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은행을 처음 봐서 영 믿어지지 않았다.


은행 셔터가 내려가도록 상담을 받은 후 제주공항으로 가는 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대출 상담을 받는 일은 언제나 마음이 무겁다. 나의 실체와 현실을 낱낱이 까발리고 돈을 빌리는 절차인데, 매번 초라해지는 기분을 피할 수가 없다.



드디어 원했던 집도 꿈처럼 나타났고,

매수를 하겠다고 말했고,

대출도 일단 가능하다고는 한다.

거의 모든 산을 넘었지만, 마지막 산을 넘지 못하면 모두 물거품이 된다.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제주공항에 혼자 앉아 창 밖의 야자나무와 비행기들을 바라보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다.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면 그만두자.

여기까지 온 것으로 만족하고, 지금의 시간과 풍경을 마음에 담아두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자.

해볼만큼 했다.


이별이라는 건 늘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데, 이것은 무생물(집)을 대상으로 한 데다 시작조차 안된 관계(애초에 "관계"라고 할 수가 있나)와의 이별인데 왜 가슴이 이렇게 아픈지 알 수가 없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서울로 다시 돌아와 다음날부터 출근하고 일하며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제주도 은행의 전화 한 통이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지점에 놓였다.

사나흘이면 전화가 올 줄 알았는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너무 궁금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으니 연락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전화했는데 '아, 서류 검토 결과 어렵다고 나와서 빨리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너무 실망하게 될게 두려워서 이삼일은 전화해 보는 것을 미뤘다.

그 사이 집을 묶어둔 중개인에게 어떻게 되어가냐고 몇 번 연락이 왔다.

하염없이 지도 거리뷰로 그 집의 골목길을 돌아다녔다.  


밤새 또 잠을 설친 날, 이제 무엇이든 결과를 받아들이자고 마음먹고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용기를 내서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


"가능합니다. 언제 방문가능하세요?"


아.. 됐다. 됐어!!


나는 이 소식을 중개인에게 바로 알리고, 매매 계약서를 쓰는 날을 잡았다.


이제 정말 간다.

나는 결정했다.

내게 딱 한 개 있었던 화살을 드디어 날린다.




도장찍으러 가는 길 "My Way"


그 뒤로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제주도에 다녀오는 내내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를 들었다.

거금이 나가는 부동산 매매계약은 언제나 무섭고 외롭다. 앞으로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약해지는 마음을 노래에 의지해서 달랬다.  


제주도에서 매매계약을 체결하던 날, 떨리는 손으로 인감도장을 찍으며

"드디어 제 꿈을 이루네요."라고 말했다.

중개인은 별다른 말은 없었다.

나로서는 꿈에 그리기만 하던 제주행의 첫걸음이었는데, 그건 내 사정이겠지.


계약서를 품에 안고 이도동의 거리로 나오니 아직 낮이다.

이제부터는 아주 할 일이 많다.

떨리고 떨렸던 순간들을 모두 뒤로 하고, 모든 것이 결정된 지금이다.

머릿속의 공상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계획이 빈틈없이 착착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날 밤, 드디어 가족들에게 제주도에 집을 샀다고 선언했다.

모두 깜짝 놀라서 뒤집어졌지만, 가격을 듣고는 잘은 모르지만 어쨌든 싸게 산 것 같다고, 이제 뭐 어떻게 해야 하냐고 다들 눈을 빛냈다. 집에 걱정과 함께 설레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스운 일도 있었다.

원래 일주일 뒤의 어린이날이 연휴라 친오빠네 가족과 나와 아이들이 에버랜드에 가기로 약속을 해두었었다.

그날 밤, 오빠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다.  



"오빠, 다음 주에 에버랜드 가는 거 말이야. 장소 바꾸자."

"어디?"

"제주도 가자."

"엉? 갑자기 왜?"

"나 제주도에 집 샀어. 거기로 가자."

"엥??"


곧바로 오빠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런 사고를 치는 인간은 우리 집안에 나 밖에 없어서, 오빠네 가족도 뒤집어졌고, 내게 집주소를 듣고는 모두들 지도 뷰로 한참 왔다 갔다 난리였다.


그날 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와 제주도에 보이지 않는 길이 이어진 느낌이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물리적으로 느껴지는 끈이 바다 건너 땅의 끝까지 쭉 이어진 느낌이 들었다.

새벽에 눈을 떠도, 아침에 눈을 떠도 그 끈은 계속 느껴졌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다.


나의 계획은 이러했다.

다음주 어린이날에는 이미 잔금을 치른 뒤다.

그 집에 필요한 물건이 뭔지 일단 가서 살펴보고, 집 외벽에 페인트칠을 해서 색깔을 바꾸자.

작은 1층 집이니까 직접 할 수 있을 것 같다.

혼자서는 집을 고치고 단장하는 것 힘드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온 가족들 모두 동원해서 다 함께 제주도로 가보자!


 (사실 처음부터 페인트칠을 직접 하려던 것은 아니었고 인터넷으로 알아보고 미리 여러 업체에게 연락했지만, 모두 전화를 안 받고, 겨우겨우 연락이 된 한 곳에서만 시간이 걸려 대충의 견적을 받았는데 너무 비쌌다. 이 집은 너무 작아서 업자입장에서는 별로 도움이 안되는 집인가보다. 제주도에서 집을 짓거나 고치려면 도시와 달리 일단 연락도 잘 안되고, 멀다고 안 오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엔 그런 상황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제주도는 가끔 가다 짧은 일정으로 휴가를 다녀오는 곳일 뿐이었어서, 새로 떨어진 임무에 식구들은 모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이어질 고난의 여정을 그땐 알지 못한 채...


모든 식구들이 각자 짐을 챙겨 흥분되는 마음으로 어린이날 아침 김포공항에 모였다.


모든 불확실함은 사라졌고, 그 어느 때보다도 설레는 출발이었다.  

그렇게 혼자서만 왔다갔다 하던 그길을,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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