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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몽 Sep 12. 2023

첫 만남

드디어 그 집을 찾았다.

지역을 정하고 나니, 분산되던 정신이 좀 가다듬어졌다.

차분하게 네이버부동산과 제주도 소재의 3, 4 군데의 부동산 블로그를 돌아다녔다.

그런 구경만으로도 많은 꿈을 꿀 수 있어 즐거웠던 것 같다.


하지만, 태안 바닷가의 하얀 집보다 싼 집은 발견할 수 없었다.


어느덧 3주가 흘렀다.



내 생각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수십 번도 더 확인했다.

점차 마음은 가라앉았고,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냥 이번에도 열심히 부동산 공부를 했단 것으로 만족하고, 하던 일 열심히 해서 돈을 더 모으고 몇 년 뒤에 다시 생각하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드디어 그 집을 만났다.


세상은 이미 봄기운이 완연해졌다.


어느 날 오전 업무를 마치고, 점심 먹기 전 또 습관처럼 부동산 블로그에 새로 올라온 글이 없나 둘러보았다.



어...

어...??


이건..

작은 집...

가격도.. 싸다?!


지금까지 본 모든 집 중에 가장 싼 가격이었다.

태안의 하얀 집 거의 절반 가격이었다.

집의 모양도 그냥 단순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게시물의 전화번호를 확인하여 우선 문자를 보냈다.

'아.. 벌써 나갔으면 어떡하지.. 댓글이 벌써 몇 개야..'



"안녕하세요, 블로그에서 00 매물 보고 연락드립니다. 매매 가능한가요?"


.

.

.

.


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길게 느껴졌다.

핸드폰만 뚫어져라 보면서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다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가슴이 또 뛴다.


수 십분 뒤, 답장이 도착했다.


"네, 가능합니다."


!!!



나는 더 지체할 수 없어, 당장 전화를 걸었다.


이 가격의 단독주택 매물은 처음 봤기 때문에,

사실 이미 마음으로는 이 집을 사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물론 대출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전화통화로 집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집 사진은 이미 인터넷으로 본 상태였고, 집 주변 환경과, 위치가 어떠한지를 물었다.

대출도 대충 어느 정도 나올 거라고 들었다.


나는 이 집이 마음에 든다고, 사고 싶다고 했다.

중개인은 그래도 집을 한 번 보고 결정해야 하지 않냐고 했다.  

그래서 오늘 오후 비행기를 잡아타고 가겠다고 하니, 중개인은 그럼 어두워져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서두르지 말고 오라고 했다.


중개인이 나를 만류하니, 내 안의 신뢰감은 더 커졌다.

적어도 허위 매물이나 사기는 아니겠다 싶었다.


그래서 내일 오전 비행기로 가겠다고 했다.

그러면 제주 공항에 도착할 때쯤에 전화하라고 한다.

내가 올 때까지 이 매물을 묶어 두겠다고 한다.

차마 그건 부탁하기 어려웠는데, 중개인이 먼저 그렇게 해주었다.



그렇게 중개인과 다음날 제주도에서 만나기로 했다.



다시 또 제주도를 향해 날아서


이제 겨우 첫걸음을 떼었다.

밤새 잠을 설치고, 다음 날 아침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낸 후, 나는 다시 김포공항으로 내달렸다.


사진 상으로 특별히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없었다.

직접 가서 두 눈으로 집 상태 확인하고,

무엇보다도 직접 가봐야만 알 수 있는 동네 분위기, 지리적 조건을 둘러봐야지.


제발 지금부터 가는 이 걸음, 걸음마다

장애물이 나타나지 않기를 빌었다.


이륙 30분 전..

김포공항의 대기실에 앉았다.

공항의 모든 TV마다 바다에 거대하게 엎어져 있는 세월호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그날은 세월호 사고가 있었던 날이었다.


나는 세월호 사고 당시,

커다랗게 엎어져 있던 파란 배의 뒤편 사진을 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었다.

그 안에 있을 사람들...

안타까운 죽음들...

모두가 설레는 마음으로 제주도에 가던 길이었을 텐데.

제주도에 이사 가던 중인 가족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뒤집어진 배의 모습을 차마 보기가 힘들었는데,

공항의 모든 TV에 나오고 있어서 피할 수가 없었다.


날이 날이니 만큼, 제주도에 가서 내가 하려는 일이 잘 흘러가지 않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마음을 비우려 애를 썼다.



첫만남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3주 만에 다시 온 제주.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또다시 제주공항 5번 게이트를 나가서 맞이하는 훈훈한 공기와 커다란 야자나무들로 사그라든다.

참 신기했다.

그냥 오늘 이 장소에 온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심정이 되어 버렸다.  


다시 렌터카를 찾아 중개인이 알려준 주소를 찍고 출발했다.


완전히 제주도 서쪽.

남쪽 서귀포 표선리보다 가까울 줄 알았는데, 제주도가 동서로 긴 섬이어서 그런지 내비에는 꼬박 1시간이 걸린다고 나온다.


그래도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부디 괜찮은 집이기를...


가는 길의 풍경을 눈에 열심히 담았다.

과연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길일까,

아니면 결국 나는 이 길을 다시 오게 될까 수 없이 생각했다.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이 길을 가족들과 다시 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쪽 해안가로 나갈수록 점점 건물들이 작아지고, 애월을 넘어가서 한림읍으로 접어들자 집들이 점점 드문드문 나타난다. 신창리부터는 거대한 풍차들의 줄이 보인다.


제주도 서쪽은 인기 있는 관광코스가 아니기 때문에, 내 기억에 특별히 없던 곳이었다.

10년 전쯤 차로 제주도 한 바퀴를 돌면서 그냥 서쪽 해안도로를 따라 쭉 내려가본 경험이 다였다.

그때 서쪽은 굉장히 바다와 땅이 광활하다..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차를 달려 드디어 도착 2km 전..


광대한 평야가 펼쳐져 있었고, 집들이 정말 띄엄띄엄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집일까? 저 집일까?..

심장이 너무 뛰었던 것 같다.

이윽고 내비게이션의 빨간 선이 거의 사라졌고, 마지막 골목길에 접어들어 속도를 낮추고 툴툴툴툴 차를 멈췄다.

사진으로만 봤던 집이 눈앞에 나타났다.


제발, 제발 이상한 위치에 있지 않기를,

너무 흉한 몰골은 아니기를 바랐는데,

나무랄 데가 없었다.


너무 외지지도 않고, 번잡하지도 않게 이웃집 5, 6채와 함께 모여있는 작은 집이었다.

마을의 끝 집이어서 집 외곽으로는 넓고 넓은 밭이 펼쳐져 있었다.

가장 걱정했던 양식장과의 거리는 참을만했다.


바람이 무척 많이 불었지만 조용했다.

작은 집인데, 마당도 반듯하게 네모나고, 주차 걱정은 없을 정도로 주차장이 컸다.

집 앞의 골목길도 차 두대는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지 않았다.


게다가 실제로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공간감이 더 크게 느껴지고 깔끔했다.

지은 지 3년 정도 된 집이고, 주인이 낚시하려고 산 세컨하우스라 가끔만 와서인지 내부 상태가 매우 양호했다.

걱정했던 화장실과 부엌도 내가 원했던 대로 그냥 밋밋하게 생겼고 깔끔했다.

집 외벽도 상태가 좋고 색깔만 마음에 안 들었다.

벽지, 바닥, 창틀 다 무난했다.

촌스럽다고 생각되는 커튼과 가구들은 내가 바꾸면 될 일이었다.



기대 이상이었다.


정신없이 집구석구석을 눈에 담고서,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이 정도의 집은 이제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중개인에게 "이 집 제가 매수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 한 달 살기를 하러 오는 손님들도 모두 집을 모르는 상태에서 계약하고,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면서 제발 괜찮은 집이기를 기도하다가, 약속한 날 하루 종일 배나 비행기를 타고 또 자동차로 한 시간 넘게 달려서 여기에 도착해서 이 집을 처음 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 날 이 집으로 처음 가면서 내가 받았던 인상은, 후일 나를 따라온 가족들, 친구들, 이 집을 찾아온 손님들에게도 거의 비슷하게 나타났었다. 그날 내가 느꼈었던 그 조마조마함과 확인 후의 안도감, 기대 이상의 만족감들이 그대로 계속 재현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과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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