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덟, 아빠와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코로나 19가 전 세계를 휩쓸었고 순식간에 세상은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비용과 시간만 있으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갈 수 있었던 해외여행도 코로나 이후의 현실에서는 비현실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TV 뉴스에 나오는 텅 빈 인천공항의 모습은 여전히 생경하다.
아빠의 공공근로 면접 때문에 여행 일정을 한 달 당기지 않았더라면 이번 여행이 기약 없이 미뤄질 뻔했다. 만약 그랬다면, 언젠가 코로나가 사그라들어 다시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날이 왔을 때, 계획대로 아빠와 여행을 떠났을까? 장담할 수 없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세상과 사람의 일인데 또 다른 무슨 사정이 어떻게 생겨 우리 앞을 가로막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 사정이 집안에 생겼다. 2월에는 코로나 19가 세상을 뒤집어 놓더니 3월 초에는 집이 뒤집어졌다. 여행 중 아빠와 나눈 대화를 녹취한 파일을 들으며 내용을 글로 정리하는 작업을 근 몇 주 동안 해오던 어느 날 오후, 아빠와 치앙다오에서 산책을 했던 날의 녹취 파일을 듣고 있었다.
"젊었을 땐 아빠가 돈 가지고 사고 쳤다고 기껏 집 명의를 엄마한테 돌려놨더니 엄마가 그걸 다단계를 해가지고 날려먹는다고 생각하면. 그런 이상한 집안이 어디있어 진짜. 뭐 아빠가 토스하고 엄마가 스파이크 때리는 것도 아니고"
이 부분을 옮겨 적어 놓고 멍하니 있다가 불현듯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왜 나는 진작에 그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그런 이상한 집안이 여기 있다는 걸 결국 내 눈으로 확인하고 말았다. 그 후의 벌어진 상황을 미루어 보았을 때, 여행 시기를 조금만 늦춰 잡았다면 코로나 19가 아니었어도 아빠와 나는 예정대로 치앙마이에 가지 못했을 것이 확실하다. 지나고 보니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갈 수 있을 때 바로 실행에 옮겼던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다행이면서도 뒷맛이 참 쓰다.
아빠는 여전하다. 여전히 여유 있는 삶을 그리워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 평일에는 오전 8시부터 작업을 시작하는 공공근로 일을 가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를 하고 7시까지 출근한다. 얼마 전 그 얘길 듣고 뭘 그리 일찍 가냐고 물었더니 "그럼 8시부터 작업 시작하는데 8시에 나와서 작업 준비를 하냐"고 되려 나를 무안하게 만든다. 8시와 7시 사이에는 무려 60분이라는 시간이 있는데.
교회 일을 하다 돌아가실 뻔했던 분이 여전히 크고 작은 손재주가 필요한 일에 누구보다 열심히 나선다. 코로나 19 사태 이후로는 교회 내 방역 작업도 하신단다. 정작 68세에 혈압약을 드시는 본인이 코로나 19 고위험군임에도 내 힘으로는 그런 아빠를 막을 수가 없다.
치앙마이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일주일이나 떨어져 있으니 느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말한, '느 엄마한테 잘해줘야지' 했던 아빠는 여전히 유독 엄마에게 잘 삐지고 툴툴 덴다. 지난여름 복날에는 아내가 친정에 가 있는 사이 삼계탕을 먹으러 부모님 집에 갔는데 어찌나 두 분이 나를 앞에 두고 티격태격하시는지 먹은 음식이 얹힐 뻔했다. 기력도 좋으시지, 결혼한 지 40년이 넘어서 나이 일흔을 바라보는 분들이 어쩜 저렇게 목청껏 싸우실까.
엄마의 뒤늦었지만 파괴력 있는 한방 덕분에 아빠가 꾸었던 귀농의 꿈은 언제 실현될 수 있을지 더욱 불투명해졌다. 여행 내내 입버릇처럼 '여유 있게 살고 싶은데 아직도 그게 안된다는 거지'라고 말했던 아빠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하다. 그래도 아빠는 여전하다.
처음엔 아빠가 토스하고 엄마가 스파이크를 때린 거라 했는데, 다시 생각하니 아빠와 엄마는 서로를 커버(cover)해주며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아니면 서로를 탓하며 살고 계신 건지도. 어느 쪽이든 여전히 두 분에게 서로가 필요한 존재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두 분 모두 그런 걸 기대하고 결혼하지는 않았을 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의 연속이 쌓여 지금 모습이 된다.
혼란스러운 2월과 3월을 지나 4월을 지나면서도 더디지만 꾸준하게 여행의 기록을 정리하며 글을 썼다. 동시에 다른 글을 쓰기도 하고 돈벌이도 하느라 진도가 잘 안 나갔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겠지만 하루 종일 이것만 붙들고 있었다 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생각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5월, 아내가 임신했다. 아빠라는 말을 평생 입 밖으로 꺼내 만 보았지 들어본 적은 없었는데, 내년이면 나도 아빠가 된다. 그래서 요즘은 여행 이야기를 글로 쓰며 아빠 생각을 하다가 노트북을 닫으면 내가 아빠가 되는 생각을 한다. 여러모로 2020년은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빠와 치앙마이에서 보냈던 하루하루의 시간들을 한국에 돌아와서 최소한 두 번쯤은 다시 보냈다. 열다섯 시간이 넘는 녹음 기록을 듣고 옮기면서 한 번, 글로 엮으면서 또 한 번. 여행을 다녀온 후의 현재를 살아가며 지난 여행을 두어 번 반복하다 보니 생각과 글이 정리될수록 지금조차 여행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여행은 끝났어도 아빠와 나의 삶은 이어지고 있으므로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아빠와 단둘이 다녀온 8박 9일의 치앙마이 여행이 어땠는지, 이제야 비로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는 그저 ‘아빠와 여행 다녀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둘이서 여행을 다녀왔다고 해서 아빠와 나 사이에 크게 달라진 구석이 생긴 건 아니다. 그렇다고 여행 이후 벌어진 일들에 아빠와의 여행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거나 그때를 생각하며 심정적으로 대단히 위로를 얻은 것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거의 안도에 가까운 마음으로 다녀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치앙마이에 가기 전에도 마흔 해 가까이 나는 아빠의 아들이었고 아빠는 나의 아빠였으며 그 세월 동안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살았고 서로를 지켜봐 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치앙마이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농도가 짙었다는 것, 둘 밖에 없었으므로 서로 밖에 볼 수 없고 서로의 이야기밖에 들을 수 없었다. 내가 치앙마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본 유일한 대상은 아빠였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 투성이었던 아빠의 현재와 과거를 보고 들으면서 새삼 되새겼다. 대부분의 삶은 이렇듯 일상적인 어려움과 힘듦을 도화지 삼아 그 위에 순간의 기쁨과 행복을 그리고 덧칠하며 만들어진다는 걸. 정말 최선을 다해 아등바등하며 선을 그리고 색을 칠한다 해도 배경이 되는 고단함이 차지하는 면적보다 더 넓어지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림은 도화지 위에 뭔가가 그려져 있기에 그림이다.
누군가 나에게 아빠와 단둘이 다녀온 8박 9일의 여행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내 삶의 도화지 위에 작지만 아주 예쁜 그림 하나 그려 넣은 것 같다고. 아빠의 도화지에도 그랬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