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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짝 Oct 27. 2020

Day 9. 태국 여행의 마지막 식사는 평양냉면이었다

서른여덟, 아빠와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빠와 나 7

아빠를 존경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아빠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나는 그저,
아빠를 좋아한다.
가끔 밉기도 했지만.



치앙마이 국제공항


알람을 맞춰 놓은 새벽 네 시 반에 눈을 떴다. 어지간한 짐 정리는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해 놓은 터라 씻고 나설 준비를 하는 것 말고는 따로 시간 들일 일이 없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는 한, 공항에는 되도록 일찌감치 도착하는 것이 낫다는 주의라 다섯 시 조금 넘어서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에서 나왔다. 체크아웃할 때 으레 확인하는 스낵바 이용 여부에 대한 질문에 기계적으로 '노(No)'라고 대답했는데, 우리가 머물렀던 방의 상태를 확인하러 간 직원의 무전을 통해 초코바 하나가 빈 것이 밝혀져서 뒤늦게 값을 치렀다. 미리 얘기해주지 않은 아빠 덕분에 졸지에 치사한 손님이 된 것을 제외하면 다른 문제는 없었다.


치앙마이 국제공항까지 거리가 5km 안팎으로 워낙 가까운 데다 새벽 시간이라 도로가 붐비지도 않아서 호출한 택시를 얼마간 기다리고도 5시 40분이 되지 않아 치앙마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인천으로 돌아가는 비행 편은 올 때와 달리 방콕을 경유하는 여정이다. 방콕에 내린 뒤 다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가 출발할 때까지 7시간이나 비어 있어서 치앙마이 국제공항에서는 출국 수속을 하지 않고 국내선 탑승 수속만 거쳤다. 그래야 방콕 돈므앙 공항에서 나와 시내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미리 알아보지 않고 치앙마이에서 출국 수속까지 해버렸더라면 방콕에서는 꼼짝없이 공항 안에 갇혀 있을 뻔했다.


방콕에서의 일정이 남아있긴 하지만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쉬운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여행이 끝나서 아쉽다. 그건 아빠와 여행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방콕


경유지 방콕에서 갈아타는 비행기의 시간 간격은 7시간이지만 수속을 마치고 공항에서 나와 방콕 시내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과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 출국 수속을 하고 대기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아빠와 내가 방콕 시내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 시간은 서너 시간이 최대치다. 방콕 돈므앙 공항에서 도심까지는 거리도 멀고 교통체증도 아주 심한 편이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곧장 방콕 번화가 한가운데라 할 수 있는 아속역으로 이동했다. 아빠나 나나 방콕이 초행은 아니지만 치앙마이에서 일주일 넘게 머물다 방콕에 와서 보니 새삼 느껴지는 태국에서 제일 큰 도시와 두 번째로 큰 도시의 규모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격하게 표현하자면 시골 읍내에 있다가 순식간에 강남 한복판으로 이동한 느낌이랄까. 아직 태국을 벗어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치앙마이가 그리워졌다.
 

아빠를 모시고 아속역 주변에 있는 마사지 스파에 갔다. 치앙마이에서 봤던 마사지샵들보다 규모와 시설 면에서 크고 고급스러운 곳이 방콕에는 수두룩하다. 방콕에 들른 김에 좋은 데서 마사지 한 번 받으시라고, 시간 상 길게는 못하고 90분짜리 코스를 끊어드리고 나는 근처 카페에 들어가 쉬면서 아빠를 기다렸다. 앞으로 다섯 시간 넘게 좁은 비행기 좌석에 앉아야 할 것을 생각하면 아빠에게는 마사지가 더 나은 선택이지만 나는 사람 구경, 거리 구경을 하며 여행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다.


나 : 괜찮았어?


아빠 : 응, 시원하게 잘 받았네.


마사지 덕에 혈액 순환이 잘 되어서인지 개운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져서인지 아빠는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이제 공항으로 돌아가기 전에 점심 한 끼를 먹을 시간 정도가 남았다. 방콕에서 먹을 점심 메뉴는 여행 오기 전부터 미리 정해두고 진작에 아빠에게도 동의를 구했었다. 돈므앙 공항에서 나와 아속역 쪽으로 방향을 잡은 이유도 전적으로 점심 메뉴 때문이었다.

 

옥류식당 평양냉면



평양냉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지만 그동안 아빠와 같이 먹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빠가 평양냉면을 좋아하는지, 먹기는 하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이야 평양냉면이 나의 '최애(최고로 애정 하는)' 음식이라지만 사실 나는 불과 6, 7년 전에 그 맛있는 걸 처음 먹어봤고, 본격적으로 찾아서 먹기 시작할 때는 이미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있었다.
 

방콕에 북한 당국이 운영하는 '옥류식당'이라는 평양냉면집이 있다는 말을 아빠에게 해줄 때만 해도 아빠가 그렇게 관심을 보일 거란 생각은 못했다. 아빠가 면으로 된 음식은 라면 빼고 다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거기에 평양냉면도 끼어 있는지는 몰랐다. 그렇게 평양냉면은 아빠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공통분모 중에 가장 최근에 발견한 것이 되었다.


여행 마지막 식사를 하러 간 옥류식당은 이번 여행 처음이자 유일하게 우리말 소통이 가능한 식당이었다. 홀을 담당하는 매니저와 서빙하는 직원이 모두 북한에서 온 분들 이어서 그렇다. 흘러나오는 음악은 노래방 기계로 틀어놓은 북한 가요 반주였고 건네받은 메뉴판의 글씨체는 북한 관련 방송에서 보아왔던 그것과 똑같았다. 억양은 다르지만 친숙한 우리말로 주문을 받는 직원분께 아빠는 직접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도 했다.



아빠 : 확실히 우리나라에서 먹던 거랑은 다르다.
 

아빠의 말처럼 북한 식당에서 먹는 평양냉면은 우리나라에서 먹던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보다 양념장 맛이 훨씬 강했다. 그건 결이 다르다는 것이지 아빠에게나 나에게나 맛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굳이 서로 확인하지 않아도 주문한 평양냉면과 만두를 뚝딱 해치운 것만으로 알 수 있다. '결이 다르지만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닌' 것이 냉면 맛뿐은 아닌 듯했다. 옥류식당 안에 있는 모든 것, 심지어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까지도 그랬다.


식사를 마친 후 공항으로 돌아갈 택시를 호출했다. 식당분들의 배려로 더운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식당 안에서 택시를 기다렸다. 짧은 방콕 외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갈 비행기를 타는 일만 남겨두었다.

 


집으로


공항까지의 거리와 교통체증, 출국 수속이라는 변수를 감안해서 최대한 시간 여유를 두고 움직였더니 공항 내 탑승구역에 들어왔을 때는 아직 시간이 한 시간 반이나 남아 있었다. 도이인타논 투어에 동행했던 두 분 가운데 한 분이 같은 비행기로 한국에 돌아갈 예정이라고 하셨었는데 자연스럽게 게이트 앞에서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탑승 시간까지 기다렸다. 아빠는 의자에 앉아 스도쿠 책을 펼쳤고 나는 공항 구석구석을 쏘다녔다. 시간이 되어 비행기에 올라탔고 얼마 후 이륙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아빠와 무슨 말을 하고, 따로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지 않는 건, 실제로 한 일이나 한 말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떠날 때의 들뜨고 설레는 마음에 무언가를 채워 돌아가는 길, 거기에 피곤함과 아쉬움까지 얹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렇게 조용하고 차분하다.


비행기는 한국 시간으로 밤 열한 시가 넘어서 인천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에도 우리를 태우러 매형과 조카가 마중을 나왔다.


“어땠어?”


나를 보자마자 매형이 물었다. 특별한 대답을 기대하고 건넨 물음이 아니었을 것인데,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잘 다녀왔어요"


 라고만 대답했다.


출발하던 날 인천공항에 올 때처럼 아빠와 나는 매형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공항을 떠났다. 차 안에서 조카는 삼촌이 준 두리안 과자와 편지를 받고 신이 났다. 매형과 캐치볼 하는 걸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해가 바뀌어 막 열 살이 된 조카를 보면 꼭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다.
 

자정이 넘어 엄마, 아빠가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매형, 조카와 인사를 하고 아빠와 차에서 내렸다. 나는 곧장 짐가방을 단지 안에 세워두었던 내 차에 옮겨 실었다. 8박 9일 여정의 끝에서 이제는 아빠와도 헤어질 시간.


나 : 고생했어 아빠. 푹 쉬어.


아빠 : 잘 들어가, 어두운데 운전 조심하고.


짧은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라타 운전대를 잡았다. 내가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가는 아빠를 보고 나서 차에 탔는지, 아빠가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내 차를 지켜보다 집으로 들어갔는지는 기억이 가뭇하다. 어느 쪽이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라 기억해내려 애쓰지는 않았다.
 

"어땠어?"


운전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매형이 물었던 '어땠어?'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처음부터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던 건, 매형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질문이 순간 묵직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이번 여행이 나에게, 그리고 아빠에게 어떤 의미와 기억으로 남을까.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어땠나, 아빠는 어땠을까. 기록을 남기기로 작정하고 다녀온 이 여행을 나는 '어떠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집에 도착했다.

여행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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