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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짝 Jul 13. 2021

프롤로그 - 서울을 떠나며

인알못의 인테리어 턴키 시공기

프롤로그 - 서울을 떠나며

아내가 나를 만나기 한참 전부터 8년 넘게 살고 있던 낡아빠진 투룸 월세집이 위치한 동네가 재개발된 덕분에 우리는 서울 한복판에 있는 뉴타운 아파트의 임대 단지에 신혼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비록 전용면적 36제곱미터(약 11평) 짜리 작은 집이었지만 우리에게는 감지덕지였다. 주변 시세보다 말도 안 되게 저렴한 전세보증금을 들은 내 친구들은 ‘평생 와이프에게 봉사하며 살라’며 나를 도둑놈 취급했다. 그렇게 새집 냄새가 채 빠지지도 않은 신축 아파트에 입주해서 다섯 해 반을 살았다. 


석 달 뒤면 우리 부부는 서울살이를 접고 지방 도시로 떠난다. 이유라면 몇 가지 있겠는데 딱 잘라 말하면 역시나 ‘돈’과 ‘가족’때문이랄까. 서울에 버티고 눌러앉을 여지가 아예 없지는 않았으나 올해 2월에 태어난 아들을 지금보다 널찍한 집에서 키우고 싶은 욕심이 컸다. 그 욕심을 채우기에 서울은 내게 너무나 비싼 곳이다. 


5월쯤 이사를 하기로 진작에 정해놓고 지난해 11월부터 부동산 앱으로 이사 갈 동네의 아파트 시세를 부지런히 눈팅하다 2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아파트 전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지방 도시의 점찍어둔 동네는 90년대 중반에서 후반 사이에 지어진 구축 아파트가 밀집한 곳이다. 아파트는 오래됐지만 주변 환경이 비교적 쾌적한 데다 학교, 도서관, 공원, 대형마트, 종합병원과 같은 생활 인프라도 가까이에 있어 아이를 키우며 살기에 좋아 보였다. 아파트가 오래됐다는 점도 우리 집 자금 사정을 놓고 보면 오히려 장점이었다. 


문제는 씨가 말라버린 전세 매물이었다. 그나마 24평 전세는 드문드문 있었지만 32평 전세는 800세대가 넘게 사는 단지에서 단 한 개의 매물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십수 개의 아파트 단지를 탈탈 털어도 하나 있을까 말까였다. 



구축 아파트라 매매가와 전세가의 차이가 10% 미만일 정도로 딱 붙어있는 동네에서 24평과 32평 전세의 갭 또한 크지 않았다. 몇 천만 원 차이라면 그럴 바에 32평 전세를 구하고 싶었다. 중고등학교 다닐 적에 24평 아파트에서 네 식구가 함께 살았어도 한 번도 집이 좁다고 느껴보지 못했지만(아마도 네 식구가 단칸방에 살았던 더 오래전 기억 덕분이겠지만)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서울에서 인터넷과 전화로만 알아보다가 답답한 마음에 지방 도시의 그 동네로 찾아가 부동산들을 훑었다.


“32평 전세 있어요?”


부동산 문을 열고 들어서며 이렇게 말하는 나를 보는 부동산 사장님들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전에 ‘허니버터칩’이 처음 나오고 대란이 났을 때 허니버터칩이 있냐고 물어보는 나를 대하는 편의점 사장님 표정이 딱 그랬던 것 같다. ‘없는 거 뻔히 알면서 굳이 뭘 물어쌌고 그러나’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부동산 사장님 몇 분을 겪고 나자 ‘32평 전세 있어요?’는 어느새 ‘32평 전세 없죠?’로 바뀌었다.


남은 시간은 대략 석 달, 그전에 갈만한 서른 두 평 전세 매물이 나올까? 나오지 않는다면 결국 스물네 평 전세를 구해야 할까. 심란한 와중에 다른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전세가 없으면 사면 되잖아?’


매매가와 전세가의 차이가 거의 없는 구축 아파트, 어차피 신혼부부 버팀목 대출이든 보금자리론이든 땡겨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가는 돈과 갚아야 할 액수에도 큰 차이는 없다. 딱 하나, 딱 하나 아주 큰 건을 포기해야 하는 것 빼곤 말이다. 


청약을 포기하고 집을 사면 어떻겠냐는 물음에 누나와 친한 친구들이 모두 말렸다. 신혼 특공, 생애 첫 주택 특공 이런 건 서민들이 그나마 ‘똘똘한 한 채’를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편이니 그럴만하다. ‘전세로 몇 년 참으면서 부지런히 주변 신도시에 청약 넣어라’, ‘아깝게 그걸 왜 포기하고 구축 아파트를 사서 들어가냐’,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따라서 10~20년 후에는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벌어진다’는 다 일리가 있고 틀리지 않은 말들이었다. 어쩐지 첫 직장 연봉에 따라 40대 이후 생활이 달라진다는, 대학시절에 들었던 말이 오버랩됐다.


말려서 들었을 것 같으면 애초에 묻지도 않는 게 사람이다. 묻기 전부터 내 결정은 80% 이상 정해져 있었다. 나는 반쯤 망설이고 있던 아내를 설득했고, 결국 집을 사기로 했다. 신혼 특공에 당첨되어 들어간 신도시 새 아파트 집값이 우리 아들보다 더 무럭무럭 자라서 1억도 벌고 2억도 벌면 참 좋긴 하겠는데, 아이 키우면서 살기 좋은 동네 구축 아파트 한 채 사서 인테리어 말끔하게 하고 들어가 오랫동안 사는 쪽이 더 끌렸다. 집값이 언제까지나 그렇게 하염없이 솟을지 장담할 수 없고 암만 특별공급에 넣는다 해도 청약 당첨이 그렇게 녹록한 일이 아닌데 언젠가 당첨은 되겠지만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도 리스크다. 불확실한 변수를 인내하며 당장의 몇 년을 참고 사는 것보다는 지금, 바로 확실하게 만족과 안정을 얻고 싶었다. 인생은 짧고 오늘은 소중하다는, 나처럼 참을성 없고 성질 급한 사람들이 딱 좋아할 만한 명분에 의지하기로 했다.


32평 아파트 전세를 구하는 사람이 32평 아파트를 사려는 사람이 되자 나를 대하는 부동산 사장님들의 텐션이 쭉쭉 올라갔다. 저층이냐 고층이냐, 1층이냐 꼭대기냐, 남향이냐 사이드냐 등등 전세 구할 때 하고는 또 다르게 이것저것 따질 것도 많고 조건에 따라 집값도 제각각이었지만 있지도 않은 매물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했다. 


오래 살 집이니 돈을 조금 더 들이더라도 인기 있는 층수를 잡았다. 15층 아파트에 10층이니 더할 나위 없었다. 거의 수리가 되지 않아 같은 층수에 비해 비교적 집값이 싼 매물이라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들어가기에도 좋았다. 


싹 다 뜯어내고 인테리어 공사


가계약까지 마쳤다. 집을 알아보기 시작할 때부터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입주할 의향을 밝힌 나에게 부동산 사장님은 이렇게 말했었다.


“아유~ 32평이면 샷시까지 해서 올수리 하는 데 2천5백이면 충분하지”


인테리어에 이응도 모르는 내가 이 말을 덜컥 믿고 이 정도면 예산은 충분하겠다며 안심했던 게 불과 열흘 전이었다. 그 사이 나는 이제 인테리어의 딱 이응 정도까지만 알게 되었을 뿐인데도 그게 얼마나 애매모호하고 뜬구름 잡는 말이었는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사무치게 느끼는 중이다.(불가능하다는 건 아니다)


‘구축 아파트 사서 인테리어 깔끔하게 하고 들어간다’는 단순한 한 문장에, ‘깔끔하게’라는 한 단어에 얼마나 많은 선택과 고민, 인내와 고통이 뒤따르는지도 알지 못한 채, 나는 이제 막 첫 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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