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지난 고찰의 시간이 전환점을 맞이할 때
때때로 나는 심해 속을 부유하는 듯한 감정에 그대로 나를 던져놓고, 그 고요함을 평온히 헤엄치듯 내버려 두곤 했다. 그것이 결코 마냥 우울하거나 또는 늘 건강하지만은 않았어도, 나를 성찰하는 고유한 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금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먼 하늘 소리 없이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듯이. 빛 한점 없는 깊은 숲 속의 초록이 바람에 스치는 풍경처럼, 한 없이 아득한 수평선에 유유히 넘실대는 파도가 이따금씩 반복하듯이.
나는 종종 고요 속의 적당한 슬픔에서 방향을 찾으려 하곤 했고, 그것이 나름대로의 길을 걸어가는 방법이었다.
그러다 그 혼자만의 방식이 내게 삶의 태도 중 하나로 굳혀져선, 흘러가는 대로 밝게 살아가는 타인의 삶을 나의 색깔로 이염시킬 뻔했음을 깨닫고 놀라서 서둘러 접어낸 일이 있었다.
내 방식이 항상 옳거나 좋은 방법인 것도 아닌데, 내가 이런 사람이기에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는 어리석은 생각이 스치는 바람에, 무거운 그 심해의 물결을 밀어 넣으려 한 것이다.
봄바람 같이 살랑이는 연둣빛 잎사귀가 떠오르는 밝고 긍정적인 사람에게 그 심해는 얼마나 어려웠을까? 꼬리를 무는 고찰, 의미를 부여하는 말이나 행동들. 원하지 않을 땐 지긋지긋하고 답답할지 모르는 그 고뇌.
나의 흐름에 발을 담그곤 심각해지는 그 사람을 보고 나는 화들짝 놀랐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 한 거야.’
있는 그대로의 각인을 존중하고 지키면서 나는 너무 진지해지지만은 않기로 마음먹었으면서 말이다. 고찰은 좋지만, 스스로의 길은 스스로 찾아 답을 얻고 나면 공유하는 것이 꾸준히 성장하는 방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의 동류를 만난다면 함께 진하게 나누는 그
고뇌들이 아주 즐겁기도 하겠지만.
나는 일상에서 조금은 더 산뜻하고 유쾌하게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느끼던 찰나였다. 나는 소위 ‘재미없게 심각한 진지충’이 되고 싶지는 않거든.
이제는 언젠가 느꼈던 여름바람에 날리는 종이비행기같이 가뿐한 마음으로 흐름에 나를 맡겨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