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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나의 도피처

estP x isfP = 쌍코 P

by 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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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부터 속초에 가고 싶었다.

나에게 속초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다.

지쳤을 때, 혼자 도망가듯 달려가 안길 수 있는 곳.

여행이라는 말만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곳.

언젠가 꼭 살아보고 싶은 곳.


나도 쉬고 있었고, 마침 남편도 직업변경으로 며칠 공백이 생겼다.

바람흰천.png “바람과 흰 천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지.”

우리는 그렇게, 별다른 계획 없이 속초로 가기로 했다.


“내일 속초 가자. 자고 올진 내일 정하자.”

“그럼 양양도 들러서 낙산사 가자.”


12일 금요일 아침 열 시. 노트북을 챙겨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 버스를 예매하고, 돌아오는 표도 준비했다.

내일부터 비가 온다는 소식에 우리는 무박 여행을 택했다.




속초에 도착해 가려고 한 식당은 오픈 전이었다.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그냥 맞은편 식당에 들어가 점심특선을 먹었다.

배를 채운 뒤, 낙산사에 올라 절을 했다.

“오빠 하는 일 잘 되게 해 주시고, 우리 모두 건강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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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때마다 사는 팔찌도 이번에 또 샀다.

전에 샀던 두 개는 이미 끊어졌는데,

팔찌가 끊어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어떤 소원이 이뤄진 걸까 생각하며, 이번에 두 개를 새로 골랐다.

이번엔 남편도 함께.


9번 버스를 타고 속초로 넘어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 등대 해수욕장.

힘들 때도, 다시 찾아왔을 때도

늘 바다에 인사를 건넸던 곳이다.

‘나 또 왔어.’ 속으로 중얼거리며 바닷물에 발끝을 잠깐 담갔다.


9월의 바다는 또 다른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여기 버스를 타고 오가다 보니 이제는 낯설지 않다.

새롭지만 익숙한 곳.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내가 잘 아는 곳이어서 더 반가운 그런 자리.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아인슈페너를 마셨다.

이게 바로 소소한 행복일지도 모른다.

PP끼리 살면 번개처럼 찾아오는 행복을 자주 느낄 수 있다.


휩쓸려가며 살아도.

잔잔히 일렁이는 파도를 보면 내 마음도 저렇게

고요한 날이 금방 오지 않을까?




P들의 여행답게 저녁 메뉴도 정하지 않았다.

“중앙시장에 가서 식사를 하자!” 하고 갔지만

너무 늦은 탓인지 영업이 끝났다고 했다.

흠... 이럴 땐 조금 곤란하다.

결국 돌아다니며 먹고 싶은 걸 하나씩 골라보기로 했지만

금요일 저녁의 시장은 지나갈 틈도 없이 사람들이 몰아치고 있었다.


“아.. 그냥 집에 가서 밥 먹을까?”

망설이다가 감자전 하나를 겨우 사 왔다.

남편은 약간 웃긴다는 말투로

“뭐 다 본인들이 원조래”

투정 아닌 투정도 부린다.

그 많은 음식을 팔고, 사람들도 많은 틈 속에서 구석에 자리를 잡아

우리는 감자전 하나에도 소소하게 웃으면서 나눠먹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시간이 한 시간이 남았을 무렵

우리는 터미널에 미리 가 있었다.

“한 시간 남았네. 뭐 하지 우리?”

원래 같았으면 내가 먼저 말했을법한 말이었지만 이번엔 남편이 먼저 물었다.

난 그 시간조차 좋았다.

“월요일부터 다시 달려야 하잖아. 우리 지금 이 여유로움을 즐기자”

나는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터미널에서 틀어준 뉴스를 보면서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다가

집에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비록 먹고 싶던 음식은 하나도 못 먹었지만.

남편과 함께하는 이 여유로운 시간이 또 언제 올까.

그런 생각이 들자 섭섭함과 감사함이 같이 생겨났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밖을 바라보며 나는 버스 안에서 잠들지 않았다.

잘 보이지 않은 풍경 속에서도, 앞으로 더 잘될 거란 희망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우리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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