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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처녀 Mar 12. 2017

빛바랜 과거를 파는 도시

4. 무기력하지만 활기가 넘치는 곳, 이스탄불


터키 출신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이 말했듯, 이스탄불은 '몰락하여 붕괴된 제국의 잔재, 잿더미 아래서 무기력, 빈곤 그리고 우울과 함께 퇴색되며 낡아가는' 도시다.      


몰락한 제국의 잔재를 그대로 안고 관광도시로 거듭난 이곳은 현재가 아닌 과거를 팔고 있었다.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모이는 나라 가운데 한 곳이 됐지만, 과거와 같은 영광의 시간이 다시는 올 것 같지 않은 분위기를 짙게 풍긴다. 수백 년 전 저물어버린 제국이 세운 성벽들이 부서진 채 도로 곳곳에 있고, 그 이후에 지어진 건물들 또한 낡고 빛을 잃은 가난한 도시다.



이스탄불의 이런 특징은 현대 예술가들이 그들의 도시를 묘사해 놓은 현대미술관에서 더 자세히 느낄 수 있었다. 화려했던 오스만 제국 시절, 금박을 입힌 세밀화와 코발트블루 색을 쓴 화려한 도자기를 만들어냈던 이들은 이제는 빛바랜 과거를 주제삼아 예술을 한다. 'Magnificent Era(웅장한 시대)'라는 제목의 커다란 그림 한 점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림에는 마치 낡은 포스터가 붙은 슬럼가 건물 벽처럼 사진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사진은 빛이 바래 선이 희미해지기도, 찢겨있기도 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그림들 안에는 온갖 귀금속으로 치장한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화려한 궁궐과 거리의 풍경도 있었다. 이 그림은, 위대한 시절이 지나간 지 오래지만 여전히 그 시절을 품고 사는 지금의 이스탄불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었다.       


이스탄불 사람들은 이러한 현재 인식 속에서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이스탄불이라는 도시가 언젠가 다시 옛 영광을 찾을 거라는 헛된 꿈을 꾸지도 않는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낼 지를 생각한다. 나라에서 빵 값의 50%를 보전해주고, 지중해가 풍부한 채소와 과일이라는 선물을 주는 덕분이기도 하다. 생활 물가가 저렴하기 때문에 이들은 먹고사는 일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공산품의 가격은 비싼 편이다. 사치품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들에게 관광객은 돈벌이 수단이자 사기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친구이기도 하다. 낚시꾼들이 점령한 갈라타 다리 위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는 내게 자신이 품고 있던 토끼와 사진을 찍게 한 뒤 돈을 요구했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큰 시장인 ‘그랜드 바자르’ 내에서 만난 한 상인은 지나가는 나의 팔목을 억지로 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종종 무례한 사람들이지만, "귀네 꼬레(남한)"에서 왔다고 하면 환하게 웃으며 "한국전쟁에 참전했었다. 우리는 아르카다쉬(친구)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해질 무렵이 되면 이스탄불 사람들은 해변가에 나온다. 거리의 악사들은 색소폰으로 애잔한 음악을 연주한다. 뱃고동 소리가 아련함을 남기는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뾰족한 모스크 첨탑을 품은 바다 너머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붉게 물들어간다. 


그래서 오르한 파묵도 이렇게 말했나보다. 


"삶이 그렇게 최악일 수는 없어. 여전히 보스포러스로 나갈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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