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희동처녀 Mar 17. 2017

올리브 나무 사이로

6.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And Life Goes On...)

정말 올리브 나무였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다만 이란 영화 '올리브 나무 사이로(Zire Darakhatan Zeyton, 1994)'가 생각났을 뿐이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보게 된 이 영화는 길고 지루했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난 뒤 내 가슴에 따스하면서도 황량한 중동의 풍경을 남겼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걷는 가난한 남자와 부잣집 딸인 여자. 두 사람의 조심스러운 감정이 나에게도 옮았는지, 나는 한동안 이유 모를 먹먹함을 품고 살았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작고 낡은 흰색 봉고차에 10여 명의 터키인 아저씨들과 낑겨앉아 디아르바키르에서 마르딘으로 이동하는 길. 드넓은 갈색 땅 위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오래도록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수분과 영양을 공급받는지 의문일 정도로 척박한 땅 위에, 나무들은 홀로 커다랗게 서서 잎을 흔들어댔다. 하늘로 초록색 손을 뻗는 것처럼 뾰족하게 생긴 나무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휘청거리며 춤을 추었다. 


불편하고 흔들리는 작은 봉고차 창밖에서는 그렇게 영화가 펼쳐지고 있었다. 가을의 볕이 내려앉아 나뭇잎이 샛노랗게 물들었다는 차이가 있었을 뿐, '올리브 나무 사이로'의 분위기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간혹 쓸쓸한 집들이 한두 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졌다. 그렇게 2시간을 가는 동안 길은 큰 변화 없는 풍경을 보여주었다. 



버스 기사가 잠시 휴게소에 멈춰있을 때였다. "걸, 웨얼 아 유 프롬?" 어설픈 발음의 영어로 나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머리에 커다란 두건을 두른 체격이 좋은 아주머니의 이름은 아이셀이었다. 그녀는 살짝 다리를 절고 있었다. 이 버스 안에 영어가 통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터라 깜짝 놀랐다. 나는 기뻐서 '귀네 코레'에서 왔다고, 마르딘에 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마치 외운 듯한 영어로 자기는 4년 동안의 영어 수업 코스를 마쳤으며 지금까지 20년 동안 오피스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컴 위드 미!"라고 외쳤다. 


조금 고민했다. 현지인을 따라 그의 집에 가 보는 경험이 쉽게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이스탄불에서 머물렀던 호스텔 주인의 말도 생각났다. "터키에선 딱 하나만 조심하면 돼. 남자!" 젊은 여자, 아줌마, 할머니, 아이들 모두 믿고 따라가도 아무런 문제가 안 생기지만 딱 하나, 남자만 따라가지 말라고 그는 신신당부했다. 나에게 집에 가자고 한 사람은, 아줌마가 아닌가. 왠지 믿어도 될 것 같았다. 


"OK!" 그녀를 따라 마르딘에 도착하기 전 정류장에 내렸다. 역시나 황량한 도로가에 위치한 'Kilers'라는 이름의 마트. 과일, 사탕, 밀가루 같은 식료품부터 카펫이나 차량 정비도구까지 없는 게 없었다. 다리를 잘 못 쓰는 아주머니를 부축하며 함께 카트를 밀고 양배추, 닭고기, 콩줄기, 설탕 등을 샀다. 그녀는 마트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잘 아는 듯, 그들과 인사를 하며 나에게 한명 한명을 설명했다. "마이 엉클스 커즌, 앤드 히 워크 앳 뱅크." 


쇼핑을 마치자 왼손에 손가락이 하나밖에 없는 운전기사 아저씨가 따라나와 우리의 짐을 작은 차에 실어주었다. 우리는 그 차를 타고 아이셀의 집으로 갔다. 주변에 나무조차 보이지 않는 광야를 가로지르는 4차선 도로를 가다가 차는 작은 마을로 들어갔다. 동네의 낡은 흙집에는 빨래들이 걸려있었다. 염소와 닭, 고양이들이 함께 살고있었다. 마르딘 오피스마할리시, 구글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이 동네에서의 3박4일은 그렇게 시작됐다.




매거진의 이전글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결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