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흑해에서 마주한 외로움의 실체
터키 북부의 거대한 바다, 흑해. 내륙의 가운데 위치해있기에 호수처럼 보이지만 이스탄불의 좁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통해 마르마라해를 거쳐 지중해까지 연결되는 엄연한 바다다.
흑해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이 아마스라로 출발했다. 아마스라에 간 것은 오로지 흑해를 보기 위해서였다. 더 찾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내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착했을 때는 한밤중이었고, 나는 숙소에 짐을 푼 뒤 숙소 앞의 바닷가로 걸어나갔다. 고깃배들은 불이 꺼진 채 부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바다를 잔잔하게 비추었고, 한 커플이 부둣가에 걸터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여행이 거의 끝나간다는 아쉬움과 동시에, 나는 뒤늦게 한없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고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몰라 당황해하고 있었다. 밤이 내려앉은 흑해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검었고, 그 미지의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두려워했다.
흑해는 파도라는 새카만 손을 내쪽으로 뻗으며 나를 끌어당기려 했다. 어두운 손길은 나를 오히려 바다 쪽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 쉽게 돌아가는 발걸음을 떼지 못한 이유는 그 짙은 어둠이 주는 우울함 때문이었다. 네모난 정육면체에 건빵처럼 구멍이 두개씩 난 돌들이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는 이 바닷가는, 강릉이나 속초의 바다를 연상케 하면서도 동시에 그곳이 아님을 실감케 했다. 수천 km 떨어진 곳에서 동질감과 이질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나는 한없이 외로워졌다.
나는 고독이 필요해서 여행을 떠났다. 마음 속의 무언가를 처리하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을 것만 같은 때가 있었다. 고독이 내게 이미 와 있으면서 동시에 절박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고독이 필요하다고, 고독의 시간을 보내면서만 내가 삶의 의미를 엮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을 때가 있었다.
여행을 떠나서 혼자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 생각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나라는 사람은 생각하기 위해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필요했고, 사람과 떨어져있는 순간이 필요했다. 둘, 셋이선 느낄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분명히 있었다. 홀로 보아야만 경이로움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외로운 것은 고독을 원했던 궁극적인 목적이 결국은 채워지기 위함이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가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신을 믿는 것도, 직업을 구하고, 먹고 자고 하는 그 모든 행위들이 궁극적으로는 삶을 채우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결국 '완전함'을 느끼기 위한 발버둥이 아닐까.
완전해지고자 떠난 여행에서, 나는 나의 완전함을 찾기 위한 자발적 모자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외로움에서 시작되는 고민들을 키우고 나만의 답을 내려가며 궁극적으로 나의 삶을 채우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런데 흑해 앞에서 급격히 외로워지니 그 고민들의 궁극적인 해답이 전부 '사랑'이 아닐까, 하는 애정결핍스러운 결론이 내려졌다. 어쩌면 맥주를 마시고 있는 커플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하나마나한 생각들을 하면서, 검디검은 흑해 바다를 들여다보며 나는 많이 외로웠다. 그래서 방파제를 따라 걸으며 옛 가수들의 노래를 이어폰으로 들으며 따라불렀다.
그러다 방파제에 부딪혀 흰 빛으로 부서지는 파도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며, 바닷가의 길 끝에 놓인 작은 등대 아래 도달했다. 등대 아래서 하늘을 바라보니 별들이 점차 선명해지고 있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라고 정호승 시인이 내가 아주 어리던 시절부터 따뜻한 문장으로 위로해주었지만, 머리로는 알면서도 외로움을 쉽게 견뎌내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가 인간이었다. 그러니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살고, 그 안에서 그럭저럭 안정을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또 어쨌든 삶은 이어지고, 나 또한 그 수많은 삶 중 하나의 점으로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