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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처녀 Jun 02. 2017

Ain't No Sunshine

19. 그녀가 떠나자 햇살도 사라졌네

그와는 이틀을 함께 여행했다. 히치하이킹으로 독일에서 터키까지 내려온 젊은 독일인 친구와 함께 여행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나라 여행자들과 달리 유럽 여행자들은 교통비와 식비를 극도로 아끼며 여행을 했다. 걷기보단 앉아서 쉬는 것을 좋아하고, 배고프게 여행하느니 돈을 쓰더라도 마음껏 먹는 나의 여행방식과 그의 방식은 많이 달랐다.


내가 트램을 타자고 할 때마다 그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서 여행하는 것이 더 좋다고, 오늘만큼은 한번 걸어보자고 이야기했다. 그의 설득에 넘어가 결국 목적지까지 두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걷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다리만 아프고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여행이 끝난 뒤 그날 지나쳐온 길거리 풍경들이 다른 어떤 기억보다도 생생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의 2m에 육박하는 독일인 남성들과 달리 그는 키가 그리 크지 않았다. "어렸을 때 많이 앓았어. 열도 많이 나고, 밥도 잘 못 먹었대. 그래서 한창 클 때 못 커서 키가 작아. 별게 아닌데도 꽤 오랫동안 나에게 굉장히 큰 콤플렉스였어." 그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건강한 친구들을 부러워하던 어린 소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채식주의자인 그와는 밥먹을 식당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고기를 먹었지만, 고기를 먹기 위해 인간이 동물을 사육하는 방식이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해 채식을 시작해봤다고 그는 말했다. 의외로 고기 없이도 인생은 살만했다. 그는 그렇게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야채스프를 파는 식당에서 스프, 빵, 샐러드를 먹고 배를 채운 뒤 우리는 목적지였던 어느 성에 도착했다. 요새로 지어진 그 성은 이제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주할 수 있는 전망대가 되었다. 가파른 성벽을 오르기 힘들어하자 그는 손을 내밀었고, 우리 둘은 손을 잡고 올라가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나란히 자리잡았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지는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그는 여행은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그만큼 잔인하다며 말을 꺼냈다.


"예를 들어, 내가 여행 중에 어떤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고 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녀에게 나의 마음을 이야기할 수 없어. 나와 그녀의 행선지가 다르니까. 이 감정은 책임질 수 없는 감정이 되는 거지.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내 감정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그녀를 떠나게 될 거야. 그렇다면 과연 내가, 내가 원하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겨우 예약해 둔 다음 비행기표, 다음 여정 때문에 그 순간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감정을 포기하는 거잖아. 나는 자유롭고 나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는데, 오히려 여행에 나의 삶이 구속되는 모순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거지."


나는 그에게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야기한 그 여자는 나였을 지도, 아닐 지도 모른다. 만일 그가 말한 대상이 나였다 하더라도 그가 전달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 또한 답변이 아니라 듣는 일이었다. 우리는 해가 떨어질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다 성벽에서 내려왔다.


이날 새벽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와 간단하게 저녁을 먹은 뒤, 나는 내 짐을 챙겨 체크아웃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호스텔 밖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달 간의 여행 내내 한번도 내리지 않았던 비였다. 비가 거세지 않았기에 트램 타는 곳까지 혼자 갈 수 있다고, 걱정 말라고 말했지만 그는 인사는 하고 헤어져야 한다며 내 캐리어를 집어들었다.


"Ain't no sunshine when she's gone." 그는 이렇게 말한 뒤 활짝 웃으며 우산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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