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셔츠의 그 사람
친구가 나의 사랑 글이 좋다고 했다. 뮤즈, 야구,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것들에 대해 쓴 글이 좋다고 했다. 당연했다. 사진에도 피사체의 애정이 담기는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쓴 글에도 애정이 담기기 마련이다.
뮤즈에 대한 글이 그렇다. 참고로 내 뮤즈는 단어의 뜻에 반대되게 남자다. (뮤즈는 통상적으로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며, 차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저는 그냥 쓸게요) 많은 신입생들이 꿈꾸는 그 ‘조별과제 선배’였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하얬고, 옷을 잘 입었고, 쌍커풀이 없는 눈에 목소리가 좋았다. 그냥 내 이상형이었다.
뮤즈의 배경은 겨울이다. 물론 더운 여름에도 몇 번 약속을 하여 만났으나, 무언가 기억에 남는 날은 추웠다. 처음 둘이 술을 먹은 날도 겨울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학교 근처 민속 주점에서 알탕과 소주를 먹었다. 그날 나는 내 지나간 마음을 고백했었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알고 있었다며 말해주었다. 몰랐다면 서운했을 것 같다. 몰랐을 수가 없지!
뮤즈는 “나를 보는 눈을 보면 네 맘을 몰랐다고 하기엔… 어렵지”라며 당시의 나를 회상했다. 그랬다. 당시 그를 바라보는 내 눈빛을 봤다면 누구나 사랑을 느꼈을 것 같다. 한 학기 수업이 끝나고 그가 듣는다던 계절학기까지 같이 들었다. 뮤즈가 들어서 들었다. 같이 있고 싶었다. 그 해 겨울 가장 잊지 못했던 장면은, 손에 든 바꾼 핸드폰을 자랑하며 맑게 웃었던 모습이었다. 그 미소는 꾸준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뮤즈는 술을 먹고 들어가는 길이면 가끔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100분이고, 200분이고 핸드폰이 뜨거워질 때까지 통화했다. 나눴던 대화는 서로의 연애와 학교에 대한 얘기, 미래에 대한 두려움, 결혼관과 가족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되는지, 그런 얘기였다. 이게 스물 넷과 스물 일곱의 대화였으니 신기하죠? 그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나 강요하진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로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내가 좋아하는 뮤즈가 하니 당연히 좋을 수 밖에요. 혼란스러웠던 그 시기에 뮤즈와의 대화는 늘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라는 말은 뮤즈가 가장 먼저 했다. 그 뒤로도 종종 듣곤 했던 말이었지만 처음은 뮤즈였다. 나랑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 사람이 나를 관통하는 말을 제일 처음 할 줄이야…, 하며 놀란 건 당연했다. ‘모든 문제에 원인을 굳이 찾으려고 하지마’라는 마음이 편해지는 말을 해준 것도 뮤즈였다.
뮤즈가 술을 먹고 전화대신 카톡을 한 적이 있다. 안개낀 것처럼 네가 뿌옇다고, 집에 가는 길인데 생각나서 연락했다고. 누가 보면 그냥 끼부리는 카톡인데, 나는 이 카톡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단톡방이 많아 갠톡방은 종종 정리하는데 뮤즈의 카톡방은 나갈 수 없다. 내 생각해줘서 고마워.
아, 뮤즈가 뮤즈가 된 이유는 단순하다. 그냥 내가 이렇게 상대에 대해 글을 쓰게 해주니까 뮤즈다. 물론 이상형이어서 그렇긴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종종 전화통화를 하고, 만나서 술을 먹는다. 우리의 관계는 쉽게 정의내리기 어렵다. 내가 그를 더 좋아한다고 해서 우리 관계에 갑과 을이 있지는 않다. 물론 그가 나를 더 굽어 살펴주기는 하지만, 그건 나이와 경험과 인성 같은 것에서 나오는 여유일 뿐이다. 광진구 거리를 함께 돌아다니던 뮤즈는 조만간 결혼이 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마음 편히 살기를 바라는 것처럼, 나도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ps. 그렇지만 결혼 소식을 카톡 프사로 알리면 죽여버릴 테다. 모바일 청첩장도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