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옷 코너 앞에서 망설인 저녁

여자아이 사춘기를 7개월 앞당기는 스트레스와 체중, 그 연구를 읽고

by 전의혁

마트 속옷 코너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딸이 저쪽 신발 코너를 구경하는 사이.

"스포츠 브라 같은 거, 한번 볼까."

아이가 지난주에 그렇게 말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다.

내가 처음 속옷을 산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엄마랑 동네 시장 속옷 가게에서.

그땐 늦은 편도 아니었다.


지금 아이 반에는 이미 몇 명이 입는다고 했다.

빠른 애들은 훨씬 전부터 입었다고도 했다.

아이 사춘기가 대체로 빨라졌다는 얘기는 엄마들 단톡방에서 자주 나왔다.


20260424 _ 딸의 사춘기 7개월 앞당기는 의외의 삼각관계 _ 2.png


음식 때문이라고도 하고, 환경 호르몬 때문이라고도 한다.

다 맞는 말 같은데, 다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들렸다.


어제 본 연구는 조금 다르게 말했다.

컬럼비아대 연구팀이 미국·캐나다 여자아이 327명의 소변을 분석했다.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높고 체질량지수가 높은 아이들은 사춘기가 평균 7개월 일찍 시작됐다.


놀라운 건 주역이 에스트로겐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스트레스 호르몬과 안드로겐, 그러니까 흔히 남성 호르몬이라 부르는 쪽이 가슴 발달을 앞당기는 주된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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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장에서 잠깐 멈췄다.


우리 집 저녁 시간을 떠올렸다.

식탁에서 내가 자주 한숨을 쉰다.


남편이랑 말다툼을 아이 앞에서 한 적이 있다.

학원 숙제 안 했다고 다그친 날이 이번 달에 몇 번이었더라.


아이 스트레스 호르몬이 어느 순간에 올라갈지.

나는 그걸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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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암 가족력이 있든 없든 이 연구 결과는 똑같이 나타났다고 한다.

유전보다 환경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뜻이다.


그 말이 무섭기도 하고, 조금 다행이기도 했다.

바꿀 수 있는 것에 속한다는 뜻이니까.


혹시 당신에게도 비슷한 순간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아이의 몸이 내 예상보다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속옷 코너에서 결국 아이를 불렀다.

둘이 나란히 섰다.

"엄마, 그냥 면으로 된 거."

아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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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서 그날 저녁엔 소리를 내지 않았다.

학원 숙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이랑 같이 드라마를 한 편 봤다.

별것도 아닌데, 아이가 크게 웃었다.


그게 시작일 수 있다.



[출처]

Lauren C Houghton, Eva Siegel, Ying Wei, Stefan A Wudy, Michaela F Hartmann, Frank Stanczyk, Julia A Knight, Irene L Andrulis, Angela R Bradbury, Lisa Schwartz, Saundra S Buys, Mary B Daly, Esther M John, Wendy K Chung, Regina M Santella, Russell D Romeo, Mary Beth Terry, Steroids, stress, and body mass index interact to accelerate female pubertal development, The Journal of Clinical Endocrinology & Metabolism, 2026;, dgag086,

https://doi.org/10.1210/clinem/dgag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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