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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명하는 그럴 이유

- 느린 걸음으로 -

by 산들바람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 나태주 11월 -


하늘이 어둡고 침침해서 행여 눈이 올까 싶었는데, 가는 실줄기의 비가 왔습니다.

첫눈이 오지 않을까 기다렸나 봅니다.

하늘을 자꾸 올려다보게 됩니다.


늦은 11월의 지금이 누군가에게는 늦은 가을이고, 누군가에는 초겨울인가 봅니다.

구름이 낀 날에는 그 습기가 비가 되거나, 눈이 되어내립니다.

구름 속의 수증기는 뭉쳐서 따뜻한 곳을 만나면 비로 내리고, 추운 공기를 만나면 눈입니다.

따뜻한 군고구마가 제격인 눈 오는 날은 정작 수증기 자신이 차가운 곳을 지날 때 이뤄집니다.

차라리 자신을 얼어붙게 만드는 극한에서 그의 모습은 더 아름답고, 따뜻해지나 봅니다.

얼마나 추웠길래, 그렇게 부드럽고 포근한 눈송이를만들어냈을까요?


비가 오면 처마 밑으로 숨어 빗소리만 듣고 싶은데, 눈이 오면 목도리를 칭칭 감고 나가고 싶습니다.

비가 오면 빗소리에 잠들고 싶은데, 눈이 오면 아이처럼 즐거운 소리로 깨어있고 싶습니다.

비에는 온갖 수식이 붙습니다. 안개비, 는개(안개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 이슬비, 억수, 장대비, 봄비, 가을비, 겨울비, 밤비, 여우비, 소나기, 궃은비, 큰비, 장맛비, 단비, 찬비. 겨우 먼지가 나지 않을 정도로 조금 오는 비를 먼지잼이라 하고, 장마에 큰 물이 난 뒤 한동안 쉬었다가 한바탕 내리는 개부심.. 비에는 참으로 다양한 이름이 붙습니다. 장맛비에도 봄장마, 건들장마, 늦장마, 억수장마라는 말이 따로 이름이 붙습니다. 비는 눈보다는 더 오래 내리기에 그렇게 많은 표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눈은 단조롭습니다. 작은 알갱이의 가루눈, 꼭 싸라기(부스러진 쌀)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은 싸라기 눈그리고 수북하게 쌓이는 함박눈이 전부입니다. 포근한 솜털처럼 사뿐히 내리는 눈송이는 소리도 없이 내려서 바라봐야만 압니다. 그나마 싱가포르, 호주 퍼스에서는 눈을 볼 수도 없습니다.


문득,

비 그리고 눈을 생각하다 보니, 우리 삶에도 어느 때에 비가 되고, 어느 때는 눈이 될까요?

지금 그대는 어떤 온도의 지대를 지나고 계신가요?

한없이 차디찬 인생 지대를 지난다면 눈이 될 것이고, 따뜻하다면 비가 되겠네요.

어디에 머물고 있는 것인지가 우리의 일상에 비가 되거나 눈이 되니까요.


무엇이든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심지어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차가운 곳을 지나는 때가 있습니다.

밥을 먹는 자신이 그렇게 미울 수 없습니다.

그럴 때는 밥 숟가락이 목에 걸려서 밥 한술도 평범하지 않습니다.


밥은 모두가 먹어야 하는 것이기에,

밥 없이는 살 수 없지만,

내 목구멍에 넘어가는 것은 나의 밥입니다.

그 밥을 먹어야 하는데,

밥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한 술 뜨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는 고통 앞에 있을 때 압니다.

그 일이 큰 일이라면,

우리가 사람들과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말하고 웃는 일은 얼마나 더 큰 일인가요?


그때 자신이 아프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무작정 대책 없이 한없이 오들오들 떨면서

그 길에 놓인 자신에게 묻습니다.

'왜 이렇게 아픈지 모르겠다고..'

그런데

함박눈을 만드느라 그렇게 추웠습니다.


이제껏 ‘나’라고 믿었는데

‘내’가 아니라는 생소함으로

유체이탈되어 바라본 ‘나’,

떨고 있는 ‘나’

아무 대책 없이 바라봐야만 하는 ‘나’

그 가운데 낯선 사람이

바로 ‘나’였습니다.


밥 한술이 목구멍에 걸릴 때

‘나’를 지켜준,

단 한 사람은

‘나’였습니다.


사람에게 등을 기대지 않아야 살 수 있고,

사람에게 마음을 기대하지 않아야 살 수 있었습니다


포근한 눈을 만들어

소담하게 내리기 위해서

‘나’를 만들어내 온

마음 한냉지대를 지나오면서

한없이 차갑게

길들여진 ‘나’를 변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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