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 풍경으로 -
집!
일상을 담는 큰 그릇, 그리고 곧 그 자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머물러 살아왔는가?
나를 키웠던 집
나는 많은 집을 거쳐 살아왔다. 얼마나 많은 집에서 머물렀는가 궁금했다. 세어보고 싶었다. 살았던 집의 숫자를.
가장 오래된 집부터 떠올렸다. 그런데 태어나서 살았던 집은 기억이 나지 않아, 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태어나서 내가 머물렀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집들이 궁금했다.
어머니는 나를 낳으셨던 집부터 기억을 떠올리시며 말씀해 주셨다.
초등학교 교사이셨던 아버지의 근무지인 전남 고흥군 남열리 학교 관사에서 나의 집 역사는 시작되었다.
다음 집은, 그리고 다음 집은.. 그렇게 쭉 시골집의 마을 리(里)를 불러주시면서 나열하고 계신다.
마을의 집을 말씀하실 때, 거기 살았을 때 있었던 단상을 덧붙여 이야기가 옆길로 자꾸 빠져나가신다.
어머니가 불러주시는 대로 옮겨다닌 집을 메모를 해서 세어보니 열 네 곳이다.
나는 부모님 집에서도, 이모 집에서도, 그리고 외할머니집에서도 지냈다.
한 집에서 평균적으로 2년을 넘기지 못하고 다녔다.
어릴 때는 아파트의 주거 형태가 흔하지 않았다. 한옥과 양옥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단독 주택이 대부분이었다.
태어나 처음 부모님 집은 한옥이었다. 방학이면 외할머니 집으로 보내졌는데, 툇마루를 높이 올라가야 하는 한옥집이었다. 우리 집은 나무 대문을 삐그덕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는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집에 사는 사람을 기준으로 할 때에는 최대한 멀리 화장실이 배치되어 있었던 셈이다. 건물은 일자형이었고, 방들이 옆으로 나란하게 붙어 있었다. 전면에는 마루가 있어서 댓돌 위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면 마루였다. 그 마루에서 방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은 창호지를 바른 격자문의 나무문이었다. 문을 열면 삐그덕 소리가 났다. 둥근 모양의 쇠로 만든 문고리가 달려있었는데, 겨울에는 그 문고리가 얼어서 손에 찰싹 달라붙기도 했다. 혼자 잠을 자던 나는 문고리의 잠금이 바깥에서도 헐거워 열리게 되므로, 무서울 때는 숟가락을 끼워서 잠갔다.
가운데 안방에는 부모님이, 왼쪽으로 오빠와 남동생이, 그리고 나는 부엌과 가까운 방(부엌방)에서 지냈다. 오빠와 남동생들 방은 방과 방 사이에 위치하여 들어가면 따뜻하고 안온했다. 무엇보다 의자가 놓인 책상이 하나 있었다. 그 안온함과 책상이 부럽기만 하였다. 내 방은 맨 끝에 위치해 거의 바깥에 있는 것처럼 웃풍이 세서 이불 속에 들어가야 겨우 온기를 유지했다. 나는 이불을 어깨까지 둘러쓰고 밥상을 놓고 책을 보고 공부를 했다.
부엌은 안방에서 바닥이 두 계단 정도 내려와 있는 정지(정줏간)였다. 아궁이에서 불을 피워서 밥을 하고 설강에는 그릇들이 놓여 있었다. 부엌에서 밥을 차리면 사각형의 밥상을 안방으로 들여다 놓아야 하는데, 만만치 않은 일이다. 밥그릇의 수가 많고, 밥의 양도 많아 무거웠다. 양쪽에서 두 사람이 들어야 되는데, 서로 잡는 높이가 맞지 않으면 음식이 옆으로 쏠려서 자칫 쏟아져 내릴 수 있었다. 연탄불에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드는 것도, 그렇게 만든 음식을 차리는 것도, 밥상을 안방에 옮기는 것도, 그 밥상을 다시 부엌으로 가지고 오는 것도, 부엌에서 찬물로 그릇을 씻는 일도 모두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일이다. 한 끼의 밥에는 어머니의 수고로움이 얼마나 있어야 했을까?
어머니가 집 밖에 있는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시는 날에는 그 빨랫감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서 물기를 툭 툭 털어서 빨랫줄에 널곤 했다. 어머니는 툇마루를 마른 걸레질로 광이 나게 닦는 일을 시키곤 하셨다. 언제까지 그런 집에 살았나 계산해 보니, 불과 50년 전이다. 나도 깜짝 놀랐다. 50년 만의 집은 얼마나 많이 달라졌나를 생각하다 보니, 엄청난 과거의 일인 것 같은데 실은 50년이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모님이 드디어 2층 양옥집을 지어 이사를 가게 되었다. 물론 2층은 세를 내주고, 본채에 붙은 상하방은 (말 그대로 방이 일렬로 2개, 그리고 부엌이 있는 구조) 시골에서 올라온 누나와 남동생이 자취를 하던 남매에게 세를 내놓으셨다. 겉으로 보면 가운데 거실을 중심으로 ㄷ자 형태로 방이 배치되었는데, 상하방은 오른쪽에 붙어 있어서 마치 한 가족이 사는 것 같았다. 식사 때가 되면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 밥상에 무엇이 올라가는지 알았다. 소곤소곤 이야기해도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들을 수밖에 없었던 그런 집이었다.
나는 심심하면 2층에 전세로 살고 있던 아주머니 집으로 놀러 갔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새댁 아주머니는 아기를 낳아서 키우고 계셨는데, 그 방에 놀러 가면 아이의 젖 냄새가 났다. 천장에 모빌을 달아놓고 아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까르르 웃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서 가끔 아기를 보러 간다면서 놀러 갔다.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면 어떻게 사는지 볼 수 있는 신비로운 세계이기도 했다. 젊은 그분은 아기를 위해 자수도 놓으시고, 크로셔 뜨개도 하고, 겨울에는 대바늘 뜨개도 하시면서 손뜨개의 재미를 전수해 주셨다. 참 많이 귀찮은 존재였을텐데, 이불속에 발을 집어넣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주셨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바깥에는 난간 주변에 빨랫줄을 걸어놓고 아기 면기저귀를 삶아서 널어 바람에 날리는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느 날은 부모님이 마당에 연못을 만들기로 작정하셨나 보다. 학교에 다녀오니, 온통 마당의 흙을 삽으로 파고 계셨다. 타원형으로 모양을 잡아 대략 1미터 깊이로 땅을 파셨다. 어느 정도 얼추 모양이 잡히니 이번에는 시멘트 몰탈을 반죽해서 붓고, 흙손으로 잘 문질러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셨다. 이젠 모양이 갖추어졌으니, 연못 안을 꾸며야 하는데, 별다른 재료가 없으니 배낭을 메고 집에서 가까운 계곡을 가셨다. 계곡의 반들반들한 돌들을 몇 개를 주워오기 위함이다. 어떤 날은 나도 따라갔다. 계곡에 물장난하러 온 여러 피서객들 사이를 우리는 오로지 돌을 찾아서 헤매었다. 예쁘고 둥근 형태를 찾아서 그것을 가방을 담아 오면 돌이 얼마나 무거운가? 그것을 어깨가 미어지고 짊어지고,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연못 안에 들여다 놓았다.
수돗물을 연못 안에 가득 차게 받아놓고 시멘트의 불순물 성분과 수돗물의 염소 성분을 없애기 위해서 며칠간 방치하여 그 물을 바닥에 있는 배수 구멍으로 빼내었다. 잘 안 빠져나가서 두레박으로 퍼내기도 했었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시장에서 어머니는 빨간 금붕어 몇 마리를 사 오셨다. 꼬리를 부채처럼 좌우로 흔들어대던 금붕어가 물속에서 돌아다니면서 놀고 있는 것은 참 보기 좋았다. 금붕어 먹이를 사서 물에 뿌려주면 얼른 달려와 주둥이를 뻐끔거리면서 주워 먹었다. 너무 많이 준 날은 배가 너무 빵빵해서 죽기도 했다. 겨울이 되었다.
사람도 추웠는데, 연못의 물이 모두 얼었다. 나는 얼어붙은 물속에 금붕어가 동면하듯 얼음 아래쪽 물에서 놀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살얼음이 얼었을 때는 그렇게 놀고 있었다. 너무 추워서 그 물이 두껍게 얼었을 때는 놀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동면하듯 살아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봄이 되어 물이 풀리면, 붕어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금붕어는 모두 얼어 죽고 말았다. 얼어 죽은 금붕어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봄이 되었어도, 다시 연못 주변을 얼씬거리지 않았다. 지금 다시 생각하니, 그 금붕어를 모두 뜰채로 떠서 집안에 들여다 놓고 키웠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 생각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나를 담은 집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내다가 전남 신안군의 임자도로 교사 발령을 받았다.
그때부터는 혼자 거취 하던 방 한 칸이 내 집이었다. 섬마을 학교의 관사는 나의 첫 공간, 집이었다.
자취방은 네 곳을 옮겨 다녔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처음으로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전남 해남군 읍내에 한 동이 전부였던 아파트로 전셋집이 생겼다.
결혼 이후 열 곳의 집을 옮겨 다녔다.
지금은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다. 나의 집 스토리는 투자나, 재산 그리고 인테리어 등의 개념과는 멀리 떨어진 내가 머물렀던 생애 공간에 관한 역사이다.
지금까지
나를 담아 온 집들은
서른 곳이다.
지금 그 집들은
사라진 것들도 있지만,
나는
나를
그 집에 남겨두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