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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한다.

- 마음 풍경 -

by 산들바람

밥상을 차리기 위해서 오늘도 밥을 한다.

밥을 하는 행위는 내 생애 가장 오래된 지루한 일상이고, 번거로운 일이다.

밥 하기 싫을 때도 참 많다. 그럼에도 밥을 해야 하고, 밥을 한다.

밥을 기다리고, 밥을 차리면 밥으로 한 자리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있으니, 밥을 한다

혼자 있을 때는 그래서 밥 대신에 라면을 끓여 먹기도 한다.

대체로 오로지 나만을 위한 밥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밥을 하는 일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숭고한 일이다.


어릴 때 방학이면 나는 외갓집으로 보내졌다.

외가는 내 기억 속에서 집이 가지고 있던 공간(높은 문지방, 대청마루, 외양간)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추억으로 떠오르는 기억은 유독 밥과 관련된 장면이다. 외할머니는 나무를 하러 산에 가셨다. 소나무가 많았던 산에서 바닥에 푹신하게 깔린 솔가지도 필수아이템이었다. 솔가지에 성냥불을 당겨서 그 불씨를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간혹 집 근처 산에 올라 떨어진 마른 솔가지를 보면 할머니께서 갈퀴로 긁어모아 불을 붙이는 장면과 굴뚝에서 피어올라오던 연기, 그리고 그 냄새까지 생생하게 자동연상이 된다. 뇌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들은 무의식적인 '카논 뉴런'에 의한 '문화기억'이라고 한다는 것을 최근 책에서 배웠다.


인지심리학에서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도 실제 행동하는 것과 같은 뇌의 특정 부위가 활성회되는 것을 '거울 뉴런'이라 하고, 어떤 물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물건과 관련된 감각 및 운동영역이 활성화되는 것은 '카논 뉴런'이라고 한다. - 창조적 시선 (김정운)에서 발췌 -


나는 부뚜막 앞에 할머니와 나란히 쪼그려 앉아 있던 시간을 참 좋아했다. 비녀로 쪽진 머리의 할머니가 내 옆에 있고, 아궁이에서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세상의 가장 좋은 냄새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마솥의 김이 솔솔 올라오면서 밥이 되고 사그라드는 불에는 석쇠를 올리고 갈치를 구워내셨다.

밥상의 규칙을 가지고 계셨던 할아버지의 밥을 하시던 할머니는 그때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매 끼니 정갈해야 하고, 구운 생선이 올라가야 하고, 밥을 먹으면서 소리를 내면 복이 달아난다고 야단을 치시고, 꼭 숭늉을 드셔야 하시던 할아버지의 밥상을 차리시던 할머니.

남편의 밥상을 차리기 위해 밥을 하러 태어나신 듯 할머니 일평생의 숙제가 되셨다.

할머니에게도 어린 소녀의 시간이 있었고, 여전히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음을 그때의 나는 몰랐다.


만날 수 없지만,

꼭 다시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숭고한 장면으로 떠오르는 밥을 하시던 할머니!

다시 만나면, 가장 먼저 두 손을 꼭 잡아드리고, 그리고 내 손으로 밥을 지어드리고 싶다.


결국 할머니는 부엌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누군가 차려준 밥상을 받아야 하는 연세가 되셨어도여전히 할아버지의 밥상을 차리기 위해서 이른 새벽부엌 문지방을 넘으시다가 쓰러지셨다.

부뚜막 솥에 쌀을 안치고, 솔가지로 불을 붙여서 아궁이에서 밥을 하시던 외할머니 뒷모습은 지금도 존경스럽고, 아직도 그립다.


밥이 전기밥솥 안에서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기밥솥의 밥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밥은 '하는 것', '짓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애착 밥솥이 있다. 솥이 내 손 움직임에 따라 잘 길들여진 것이라, 애정이 간다.

여러 잡곡을 넣은 쌀을 잘 씻고, 그 밥솥에 안치고, 레인지 위에 올려서 불을 켜는 것에서 시작된다.

한동안은 불꽃이 넘실대는 가스레인지를 고수했다. 왠지 불꽃이 있어야 밥이 맛있어진다고 생각되었다.

도시가스를 태워 화덕의 구멍으로 올라오는 불꽃에 할머니의 부뚜막 불꽃을 오버랩하고 있는 것 같다.

'카본 뉴런'에 의한 문화적 기억은 아직도 나의 밥 짓는 행동을 좌우하고 있다.

솥 안에서 물이 끓어 쌀에 잦아들고, 압력 추가 돌아가면서 칙칙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밥 하기가 너무 싫을 때도 그 소리는 참 듣기 좋다. 그 소리를 듣고 싶어서 끼니마다 밥을 한다.

압력 추가 빙빙 돌면서 쌀에서 밥이 된다. 구수한 밥냄새를 풍긴다.

쌀과 물이 어울려서 밥으로 익어가면 생녹말이 호화된 녹말로 변해서 밥풀로 서로 엉켜 붙는다.

일부러 낮은 불에서 좀 더 오래 뜸을 들인다.

적당히 갈색으로 변한 밥알이 밥솥 바닥에 눌어붙은누룽지를 만들기 위함이다.

누룽지를 얻기 위해서라도 매 끼니 불을 살리고, 불의 강약을 살펴서 밥을 짓는다.


밥을 한다.


밥솥에서 치리릭 잡곡밥이 익어가고

뚝배기에서 된장찌개를 끓이며

레인지 앞에 서서 물었다.

할머니는 밥을 하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된장 뚝배기의 국물이 끓어올라

손댈 수도 없는 뜨거움으로

된장도, 냉이도, 양파도, 고추도 익어가듯

나의 일상도 펄펄 끓어 익어가는지를 묻는다.


냄비 안에서는 무, 감자 깔린 갈치가 졸여지고

무쇠 프라이팬에서 꽈리고추 멸치가 볶아지고

그릴에서 고등어 한 마리가 구워진다.

아삭한 총각김치와

들기름으로 구운 김을 접시에 담고

밥상 한가운데 뚝배기를 놓으며 묻는다

나도 온기를 담아 살아가고 있는가?


밥을 해서

밥상을 차리며

그리운 사람들이 생각난다.


이제

봄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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