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 풍경 -
시간이 흘렀다.
지금도 흐르고 있다. 어쩌면 나의 시간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지 어찌할지를 모르던 시간마저 지나가고 있다. 아니면 나는 새로운 시간 위에 서있는지도 모른다고 지금의 시간 속에서 조심스러운 마음도 가져본다.
세상에서 당연한 것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새기고 나서 맞이하는 시간들은 새로운 희망마저 조심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지나온 시간들은 앞의 시간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감히 안다고 생각했다.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알 수 없는 것으로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맞이하는 오늘. 아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할 때 오는 것임을 알았다. 이 세상에서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알 수 없다.
10월의 가을날이다.
학교에 출근하지 않는 열흘의 시간이 주어졌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는 시간이었다. 나는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간을 끊임없이 무엇을 할지 고민하고 정해져 있는 그 길 위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시간을 맞이했을 때 약간의 당혹감이 밀려왔다.
한편으로 뭔가 시간의 쳇바퀴 궤도 밖으로 아주 살짝 벗어나보면 어떨까 싶었다. 나는 내 생각 속에 멈춰버린 고민을 벗어나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작은 다짐을 했다. 나를 돌아보지 말고, 나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나에게 열흘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하며 나를 돌아보지 않고 시간을 잊고, 나를 잊을 것인가?
길 위에 있어야겠다.
사방이 막힌 공간을 벗어나 길 위에 나를 가져다 놓기로 했다.
지금과는 다른 시간을 가져야겠다. 공간 안에 갇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정해진 규칙 안에서 벗어나봐야겠다. 나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마저도 뭔가를 정해놓은 것이나, 나를 가두고 있는 생각 밖으로 뛰쳐나가야 한다는 것이 생각이었다.
걸어야 했다. 길 위에 있어야겠다. 추석 연휴라서 하향 길보다는 상향의 길이 덜 붐빌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걷고 싶었던 길이 떠올랐다. 한양 도성길이다. 길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몰랐지만, 일단 걸어보기로 했다.
배낭을 메고 운동화를 신은 것이 전부였다. 연일 날씨는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걷기에는 더 좋았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버스를 내려서 도성을 따라 계단으로 이어지는 인왕산 정상에 올랐다. 도성 옆으로 목조 계단길은 숨이 찬 오르막이었으나, 한 발을 오르면 자동으로 한 발이 떼어지면서 걸었다. 다음 날에도 같은 버스를 타고 윤동주 시인의 언덕 맞은편에 있는 돈의문에서 출발하였다. 백악마루를 지나 청운대, 숙정문에서 말바위를 지나니, 와룡공원이 나왔다. 혜화문에 도착했다. 낙산공원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걸었다. 마지막 날에는 숭례문에서 버스를 내려 남산 서울타워를 올라서 국립극장에서 장충체육관으로 내려왔다.
한양도성길의 돈의문, 숙정문, 혜화문, 숭례문의 4대 문을 모두 지나왔다. 인왕산, 백악산, 낙산, 남산(목멱산)을 걸어온 것이다. 34.04km의 50,531걸음을 떼었다.
한양도성길을 모두 걷고 나서 한강을 향했다. 반포 한강공원의 서래섬과 세빛섬을 향해 또다시 걸었다.
길 위에서 걷는 일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하지 않았다.
오르던 한양도성길 위에서 내 운동화 발 끝에 집중하면서 하염없이 숫자를 세면서 걸었다. 오르기 팍팍하던 도성길에도 끝이 있었다. 그 길 끝에서 오로지 이어지는 또 다른 길만 바라보았다.
마지막 날, 이슬비가 내려서 축축한 남산에 서울의 전경이 안개 아래에 깔려 있었다. 저 가운데 내가 있었고, 나는 나름 치열하게 나와 싸워왔다. 서울 전경을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나를 싸워 이길 대상이 아니었다.
나도 그저 연약하고 연약하여, 날마다 기도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작은 존재임을.
나에게도 도성길과 같은 산성이 필요하며, 비를 피할 작은 둥지가 있어야 한다. 잠시 포근한 우주의 기운 아래 쉬어가야 하는 것임을 생각하자, 이 세상 앞에 서있는 모든 삶에 대해 저절로 존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눈물이 흘렀다.
'아, 나는 그런 존재였으며, 우린 모두 그런 삶이었구나' '그저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구나'
나는 나를 잊으니, 새로운 내가 나타났다.
약하고 아무것도 아닌 내가 비로소 보였다.
나는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겠다.
나는 연약합니다. 오늘 하루도 힘겨워합니다.
연약한 나를 바라보니, 애쓰면서 혼자 일어서보려 수없이 넘어졌던 내가 보였다. 나는 하나도 강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라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감사와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알지 못하고, 내가 잘난 척, 내가 강한 척, 내 힘으로 이뤄진 것으로 착각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자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모름을 유일하게 알아야 하는 일이었다.
하나님.
오늘도 저는 연약하여 피난처와 산성이 필요합니다.
문제에 부딪쳐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내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기댈 곳을 빌려주시어 쓰러지고 넘어질 때마다 쉬게 하소서..
나는 나를 잊으려 걸으면서 내가 한없이 약하고 미약함을 알았습니다.
가을,
길 위에서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지 모르고,
그저 살아왔던 한없이 연약하게 서있던 나를 찾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