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떠넘기지 않고, 함께 감싸 안기
하나. 불안방에서 제일 좋아하는 책
둘. 책 앞에 붙은 책설명 종이
아이가 처음으로 혼자 학교에서 집으로 오던 날을 기억한다. 우리 집은 학교에서 제법 멀다. 중간에 가파른 경사와 복잡한 차량 통행 구간이 있어, 어른인 내가 데려다 줄 때도 ‘이 길은 혼자 다니기엔 어렵겠구나’ 싶었다. 그 길을, 아이가 처음 혼자 걸어오는 날이었다.
나는 몰래 아이의 뒤를 따랐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쿵쾅거리는 심장소리에 곧 들킬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이는 나와 정반대였다. 당당하고 담담했다.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묵묵히 약속한 길을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언제 이렇게 컸지, 엄마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생겼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앞에 짠 하고 나타났고, 어이없게도 혼자 찔끔 울고 말았다. 아이는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할 만했어.”
그것이 그날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렇게 나는 그날 처음 ‘불안방’에 들어섰다. 마음 한 구석으로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안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불안들이 책처럼 꽂혀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 하나씩 꺼내어 훑어보고, 다시 꽂고, 또 꺼내보았다. 불안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할까?
그날 이후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이 혼자 집에 오는 일이, 지금의 아이에게,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오히려 불안은 아이가 아닌, 내 곁에 있었다. 평소처럼 나는 뉴스에 나오는 수많은 사건을 떠올렸다. 상상은 나의 불안을 키웠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끔찍한 장면들이 그려졌다.
그 불안을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베란다를 기웃거리는 것뿐이었다. 베란다를 서성이며 아이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행동은 잦아졌다. 그렇게 베란다를 서성일 때마다 나는 ‘불안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내게 서재 같은 곳이다. 보통의 서재가 책들로 빼곡하듯, 여기도 나의 삶 속에 촘촘히 박혀있는 불안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책상과 의자도 있다. 다른 감정의 방들에는 없는 것들이다.
다른 감정은 가족을 통해 흘러들어왔지만, 불안만은 온전히 나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 기록하고, 분석하고, 이름 붙여야만 했다. 그래야 숨을 쉴 수 있었다. 불안은 그렇게 나를 책상 앞에 앉혔다. 나는 종종 묻는다. 사람은 원래 불안한 존재일까? 사회가 내 불안을 키운 건 아닐까? 내면에서 시작된 감정일까, 외부에서 주입된 감정일까?
시간이 지나며 불안은 더 커졌고, 나는 그것을 없애기 위해 행동했다. 무전기를 사주고, 위치 추적기를 달고, 학원차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무엇을 해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시도들은 내 불안을 아이에게 옮겨주었다. 아이 역시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이 불안은 내가 감당해야 할 나의 몫이라는 것을.
주변을 돌아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와 같은 불안 속에 살아가는 부모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왜일까. 사회는 점점 더 부모의 불안을 건드렸다. 아이를 혼자 두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직접적이든 암묵적이든 끊임없이 보냈다. 안전사고, 납치, 디지털 범죄.. 불안의 사례는 뉴스에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이 반복은 ‘가능성’이 아니라 ‘확률’처럼 느껴지게 만들었고, 사람들은 준비하지 않으면 무책임하다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이처럼 사회는 불안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했다.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선택지는 철저히 소비와 서비스 중심이었다. 휴대폰, 학원차, 위치추적기, 사교육. 부모의 불안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해결책들. 하지만 이것으로 불안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아이에게 옮겨질 뿐이었다.
경쟁과 과잉책임의 구조는 불안을 확장시켰다. 좋은 학군에 들어가지 못할까, 사교육을 안 하면 뒤처질까, 아이가 실패하면 부모의 탓일까. 이렇게 구조적 문제는 개인의 불안이 되었다. 결국 불안은 결국 아이를 과도하게 보호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아이는 자랄 수 없었다.
나도 그랬다. 오랫동안 부모의 보호 아래 살아왔다. 택시를 타는 일, 혼자 자취를 하는 일, 밤길을 걷는 일은 내 부모의 불안과 내 불안이 겹쳐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안정된 궤도에 진입하는 것만을 목표로 달렸고, 그 길 위에서 ‘불안’은 늘 나와 함께 있었다. 내가 가진 불안은 개인적 경험의 결과이자,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감정이었다. 불안은 내 안에서만 자란 것이 아니었다. 불안방의 책장은 그렇게 채워졌다. 개인의 기억과 사회의 풍경이 얽혀서.
지금도 아이는 외롭지만 혼자 그 길을 걷는다. 함께 갈 친구가 없어 종종 엄마에게 데리러 와달라고 칭얼대기도 한다. 나 역시 불안과 함께 있다 보니 왔다 갔다 한다. 그렇게 우린 함께 겪어내며 조금씩 이야기를 쌓아간다. 만나기로 한 약속을 내가 잊거나, 아이가 먼저 집에 왔는데 아무도 없어 당황하거나, 서로 엇갈려 내가 아이를 따라잡기 위해 쉼 없이 달리기도 했다.
이처럼 불안을 느낄 만한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현실 속에 산재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토닥이고, 대화해 나갔다. 함께 가야 할 길, 가지 말아야 할 길, 만약의 상황에 대한 약속도 함께 세웠다. 그 시간들로 우리는 함께 ‘불안’을 계획하고 대비했다. 나와 너의 불안을 확인하고, 덮고, 감싸안는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