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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미 Jan 20. 2020

D-365 | 우리는 딴짓할 때 성장한다

2부 | 丙申年을 보내고 始發點을 맞다 - 퇴사하기 좋은 날

2부 | 병신년(丙申年)을 보내고 시발점(始發點)을 맞다


[그림6] 연분홍의 꽃봉오리, 봄을 알리는 시발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병신년이 가고, 정유년이 왔다. 매년 연초에 계획만 하고 실천하지 못한 많은 일들이 여전히 스마트폰 메모장에 남아있다. 사회는 대통령 탄핵으로 요동쳤고, 회사에서의 내 마음은 매너리즘으로 곪아가고 있다. 삼십 대에 접어들며 불룩 나온 뱃살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정리가 필요했다. 올해는 몸에서 부터 불필요한 건더기를 덜어내자고 마음먹었다. 올 한 해는 비록 느리더라도 차근차근 다시 꿈을 찾아가는 시발점으로 삼기로 했다.


-D-365 | 우리는 딴짓할 때 성장한다

[그림7] 딴짓의 마법, 딴짓 마법사의 돌을 손에 쥐다
우리는 딴짓할 때 성장한다. 딴짓은 매너리즘을 타파하고 엄청난 자발성과 함께 한다. 쉽사리 지치지도 않는데 이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일정량의 동기가 함유되어 있고, 그래서 충분한 각성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온전히 몰입한 경험은 실력 향상의 에너지원이다. - <퇴사일지> 중에서 -


나는 메모광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매일 일기를 써왔고 군에 입대할 때도, 첫 해외여행을 떠날 때도 가장 중요한 물건은 일기장과 펜이었다. 군대에서 폭우 속의 행군을 하면서도 10분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지면 메모지와 펜을 꺼내 느낀 바를 기록하곤 했다. 내가 남긴 수많은 기록들을 보다 보면 다시 읽기 힘든 오글거리는 멘트들도 많지만, 한편으론 세상을 바라보던 내 이십 대의 감수성에 '내가 이랬구나' 놀라기도 한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라는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대부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으로 시간을 버리거나 과거에 좋았던 추억에 단순히 잠겨있는 경우도 많다. 회사생활의 지속가능성을 의심하며 싱숭생숭한 마음을 어찌할 바 모르던 나는 생각을 차근차근 정리해보기로 했다.


[그림8-1] 자신을 찾아서 인도로 떠나세요

우선 빈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가장 보람찼던 순간이 언제였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보람찬 순간들을 모조리 적어보았다.


-고등학교 축제날, 우리의 창작연극이 끝난 무대 위 커튼콜 순간

-일기장 내용으로 첫 번째 자작곡을 만들었던 순간

-시험공부도 마다하고 광고동아리의 광고전시회를 준비하며 열띤 회의를 하던 순간

-헬기 레펠 훈련의 생명수당을 모아 병장 시절 인도행 비행기표를 결제하던 순간

-갠지스강 앞에서 처음으로 내 자작곡으로 거리공연을 하던 순간

-재능 있는 친구들을 모아 대학교 앞에서 마을축제를 열었던 순간

-라이브클럽 공연에서 처음으로 앙코르 요청을 받았던 순간


계속해서 적어 내려가다 보니 내 인생의 보람찬 순간들 속에 간단한 규칙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뿌듯한 순간들은 모조리 '딴짓'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무언가 해야만 하는 일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언제나 딴짓을 꿈꾼다. 시험기간마다 해야 할 공부는 안 하고 안 하던 방청소를 하고, 노트북을 닦고 연락이 뜸했던 친구들에게 괜히 연락해보는 알 수 없는 심보처럼 말이다. 나는 언제나 일을 벌였고 함께 할 멤버를 구했고 그들과 함께 쓸데없는 딴짓들을 구상했다. 사실은 내 앞에 주어진 쓸데 있다고들 하는 일들이 너무 쓸데없어 보였다. 주변 친구들이 혹은 부모님이 말했던 쓸데없는 일이 돌이켜보니 사실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순간들처럼 보였다.  


결코 소소하지 않은 '소소한 딴짓'

대학교 마지막 학기 취업준비는커녕 하라는 공부도 안 하고 나는 밤새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지하철로 30분이면 도착하는 신촌과 홍대로 나가서 놀았다. 지방정부에서는 대학로를 만든답시고 학교 앞에 보도블록을 다시 깔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머물다갈 만한 계기가 없는 곳에 보도블록을 깔고 표지판에 대학로라고 적는다고 대학로가 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교내의 프로젝트 지원금을 확보하고 학교에 방을 붙여 꼭꼭 숨은 기획자, 디자이너, 싱어송라이터들을 모았고 그들과 함께 우리들만의 대학로를 만들었다. 의외의 공간을 찾아다니며 게릴라 전시를 하고 마을 곳곳에서는 버스킹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전시와 공연, 플리마켓이 함께하는 마을축제를 만들었다.

[그림8-2] 공연과 전시 플리마켓이 함께하는 역곡마을 첫번째 축제 '소소한 딴짓'

조용한 배드타운인 줄로만 알았던 마을에 이런 딴짓 파티가 시작되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플리마켓 셀러로 참여한 후배 녀석은 집에 남아도는 동화책을 팔아 20만 원을 벌었고, 대학생 셀러들은 독특한 소품들을 가지고 나와 팔았다. 교환학생 시절 영국에서 구입한 간지 나는 재킷,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돌아온 학생이 현지에서 생존을 위해 제작했던 액세서리들이 있었는데, 다들 용돈 좀 벌어보겠다고 두 팔 걷고 참여한 것이었다. 가장 눈에 띄었던 건, 보따리에 한 가득 철 지난 장난감을 짊어지고 아빠와 함께 온 어린이였다. 내가 사는 동네에 이렇게 꼬마들이 많이 살았나 싶을 정도로 장난감, 동화책과 같은 키즈 템들이 불티나게 팔렸고 행사는 대성공이었다.

[그림8-3] 이제는 입지 않는 옷을 팔러나온 꼬마 셀러

'딴짓'의 힘은 대단했다. 발표 기피증이 있던 내가 동사무소에 찾아가 주민자치위원회 회의에서 지역주민들을 설득해 행사 공간을 확보하고, 버스회사를 운영하시는 아저씨에게 홍보와 트럭 지원을, 숯불갈비집 사장님에게 회식 지원을 받았다. 우리가 행사를 벌였던 마을 놀이터에는 이후 구청의 지원으로 주민들을 위한 작은 공연장이 생겼다.  '소소한 딴짓'이라는 이름으로 벌였던 마을축제는 결코 소소하지 않은 딴짓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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