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종이는 누군가의 불안을 짊어지기에는 너무 쉽게 찢어질 것만 같았다
시험 기간이면 내 책상에는 공책이 쌓였다. 대형 문구점에서 열권 묶음으로 사놓은, 저마다 한 귀퉁이에 공부해야 할 과목 이름을 적어둔 공책이었다. 국어, 수학, 영어, 역사, 기계제도, 기계공작법, 자동화 설비, 전자기기 등등. 선생님의 성향에 따라 유인물을 나눠주거나 의무적으로 필기를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나는 시험 기간에는 꼭 한 번씩 그 내용을 따로 정리하고는 했다. 일종의 요약 노트를 만드는 거였다.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성적은 고등학교 재학 내내 중상위권에 머물렀으니, 딱 그만큼의 효율은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는 기발하고 혁신적인 공부법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교과서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흩어진 정보를 압축해갔다. 최대한 짧고 간단하게, 단어나 핵심 위주로, 쓸데없는 정보는 걷어내면서.
그때는 이상하리만치 요약 노트를 만들어야 안심이 됐다. 시간이 부족해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과목이 생기면 공부한 것들이 소화되지 않고 더부룩하게 남았다. 어쩌면 심리적인 요인이 컸을 것이다. 손으로 쓰고,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한 후에야, 나는 낯선 지식을 자신의 언어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불안한 마음이 크면 클수록, 나는 더 끈질기게 무언가를 기록했다. 처음 회사에 출근했을 때도 그랬다. 조명 사이로 피어오르는 먼지와 심장을 죄는 기계음. 열아홉의 나는 긴장감에 계속 마른 침을 삼켰다. 학창 시절의 부드러운 여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날카롭고 뜨거운 것, 자칫 나를 상처 입힐 것만 같은 낯선 형상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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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장에서 처음 마주했던 기계들도 그런 형상 중 하나였다. 범용선반, 복합밀링, 탁상 드릴링 머신, 고속 절단기, 탁상 그라인더, 공구 연삭기, 용접기 등등. 내가 일했던 ‘공무 팀’은 정해진 업무를 하기보다는 공장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부서였다. 자연히 알아야 하는 지식도, 다루어야 하는 기계도 다른 부서에 비해 훨씬 많았다.
하지만 유일한 직장 상사였던 차장님은 사실상 공무 팀을 혼자 도맡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세세한 업무를 가르쳐줄 시간이 부족했다. 공장에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차장님이 달려가야 했다. 그러면 홀로 남은 나는, 주위에 흩어진 말들을 주워 모아 하나씩 수첩에 옮겨 적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회사에서는 매일매일이 시험 기간 같았다. 작업장에 있을 때는 기계 사용법은 물론이고 공구의 위치, 현장에서 사용하는 명칭, 가공 시에 재료마다 주의해야 하는 부분은 뭔지, 또 자주 말썽을 일으키는 기계와 대처 방법을 수첩에다 빼곡히 썼다. 수첩에 쓴 메모는 퇴근 후 다시 공책에 옮겨 적었다. 시험공부를 하듯이 내용을 요약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공부할 과목을 적어두었던 공간에는 날짜를 기입했다. 9월 14일부터 11월 11일까지. 11월 12일부터 12월 31일까지. 2015년이 2016년으로 바뀌고, 다시 2017년으로 바뀌었다. 차장님은 꾸준히 기록하는 모습이 기특했는지, 공무팀 사무실에 내 업무일지를 보관할 수 있는 서랍장을 따로 마련해주었다. 공책은 금세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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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내내 숨 막히던 바람도 어느 정도 선선해질 무렵, 차장님과 나밖에 없던 공무 팀에도 후배가 들어왔다. 그때쯤 나는 현장 분위기에 완전히 익숙해졌다. 예고 없는 시험처럼 나를 불안하게 만들던 업무도 가벼운 문답처럼 해결할 수 있었다. 혹시 기억나지 않는 작업이 있어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업무일지를 가져와 날짜를 확인하고, 예전에 했던 고생을 돌아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걸 누군가에게 가르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후배와 함께 일 하면서 답답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기계 사용법을 알려주고 돌아서면, 5분도 안 돼서 물어볼 게 있다며 다시 달려왔다. 아니, 그 정도는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텐데. 꼭 물어보아야 하는 건지. 대답을 해 주면서도 허탈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자연스럽게 내가 강조하는 건 메모하는 습관이었다. 한 번 배운 걸 잊지 않는 게 중요해. 단순해 보이는 일도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어. 지금은 업무를 하기보다는 연구하고 고민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며 사무실에 있던 업무일지를 가져와 보여주었다. 작업대 위로 공책과 수첩이 가득 펼쳐졌다.
이렇게 많았던가? 지금까지 쓴 업무일지를 한 번에 펴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후배는 감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뭔가, 자랑스럽기보다는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그건 학창 시절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던 요약 노트를 만드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뭘 이렇게 열심히 썼을까. 이만큼 쓸 때까지, 나는 계속 불안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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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엔 처음 출근하고 썼던 업무일지를 다시 살펴보았다. 얼룩지고 색이 바랜 수첩을 한 장씩, 주의 깊게 넘겼다. 거기엔 과하다 싶을 만큼 온갖 사소한 내용이 여백을 채우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지식이, 열아홉의 나에게는 낯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소중한 조각이었다.
후배도 그럴 것이다. 자신을 상처 입힐지도 모르는 형상들 사이에서 움츠려드는 것이다. 무서우니까. 의지할 곳조차 마땅치 않기에 자꾸만 돌아보고, 되묻게 되는 것이다. 후배에게 업무일지를 쓰면 나아질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 그것만으로 괜찮은 걸까. 나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낡은 종이는 누군가의 불안을 짊어지기에는 너무 쉽게 찢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책상 저편에 밀어두었던 공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백지 위에 그날 후배에게 가르쳤던 업무를 정리했다. 강조해야 할 점과 조심해야 할 부분. 내가 겪어온 불편함과 개선점들을 기록했다. 그 작은 조각들이 누군가를 지켜주기를. 낯선 세계의 일부가 되어버린 자신을 되돌리고. 우리가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업무일지를 써 내려갔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