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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 Apr 13. 2020

얘들아, 너무 착해도 이 나라에서 살기 힘들다

적당히 싸가지도 부리고 개기기도 해야지, 묵묵하게 일만 하면 호구로 본다

   이튿날부터 시작된 비가 더운 밤까지 이어졌다. 창문 너머 들이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수많은 작은 손이, 저마다 주먹을 쥐고 마음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나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였다. 불이 꺼진 방은 눈을 뜨고 있어도 감은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초점 없는 시야로, 식지 않은 기억이 불씨처럼 간간히 떠올랐다 사라졌다.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보이는 건 G 선배의 얼굴이었다. 잔뜩 화가 난 표정. 상대를 짓누르려 힘이 들어간 말들. 나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적당히 넘어갈 붙임성과 요령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G 선배를 바라보는 나는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제가 틀린 말 했어요?


   *


   그 여름 장마는 유독 끈질겨서 잠시 멈추는가 싶다가도 금세 다시 비가 쏟아졌다. 오래 닫혀있는 하늘만큼이나 사람들의 표정에도 그늘이 졌다.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우리는 특히나 장마를 끔찍하게 여겼는데, 비가 오면 시도 때도 없이 내려가는 차단기가 문제였다. 새벽에 숨 막히는 느낌이 들어 잠에서 깨면 어김없이 에어컨이 꺼져있었다. 회사에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지만 노후 된 시설이 문제라 간단히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날도 아무런 전조 없이 팟, 하고 전등이 나갔다. 정말 그런 소리가 들렸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방안에서 순식간에 빛이 사라지려면 마땅히 소리가 필요할 것 같았다. 아아, 또 나갔네. 침대에 누워있던 K가 앓는 소리를 했다. 아아, 차단기 좀 올려주라. 말 안 해도 갈 거다. 나는 읽던 책을 덮어두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전기가 끊어지면 모두가 곤란했다.


   밖으로 나오자 복도 조명은 멀쩡하게 주변을 밝혔다. 정전이 돼도 건물 전체에 전기가 나가는 건 아니었다. 공동 샤워실을 기준으로 왼쪽에 위치한 방들이 유독 문제가 많았다. 그래도 비는 안 세니 다행인 건가. 나는 푸념 섞인 혼잣말을 하며 비상계단으로 이어진 문을 열었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복도 가운데로 길게 울렸다.


   말끔한 스덴 배전반을 안으로 나란히 잘 정리된 전선과 차단기가 보였다. 문제가 생긴 부분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타닥. 그런데 스위치가 올라가지 않았다. 어? 정확히 말하면 올리자마자 용수철이 튕기듯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설마 누전됐나? 기계를 고치다 보면 자주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건물인데, 고치거나 손을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빨리 안 올리고 뭐 하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차단기만 노려보고 있자, 비상계단 문을 열고 G 선배가 들어왔다. 그의 방도 가운데를 기준으로 왼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거 올리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나는 방금 확인했던 차단기 상태와 누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일까지 기다렸다가 관리팀에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G 선배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냥 올려라 맨날 그랬잖아. 이러는 건 처음인 거 같은데요. 에어컨 없이 어떻게 자는데, 핸드폰 충전도 안 되잖아. 그래도……. 그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괜찮다! 형이 학교 다닐 때 전기과였다이가, 그냥 올리면 된다. 쫄리면 내가 할게.


   G 선배의 행동이 너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나는 미쳐 그를 말리지 못했다. 두 번이나 고집이 꺾인 차단기는 제자리로 돌아가는 대신 더 강한 의사 표현을 하기로 작정한 듯했다. 그렇게 펑, 하고 복도 전등이 나갔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차단기 스위치를 태워버리는 강렬한 불꽃과 함께, 그건 분명 건물 전체의 빛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소리였다.


   *


   이거 완전히 죽었네요. 나는 반쯤 녹아버린 차단기를 보며 중얼거렸다. 주변의 전선까지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사무실은 괜찮으려나, 대리님한테 바로 연락드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던 G 선배는 내가 휴대전화를 꺼내자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주변은 어두웠지만 그가 무척 가까이서 마주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와씨, 니 때문에 죽을 뻔 했다이가. 그러게요 엄청 놀랐어요. 나는 장난스럽게 맞장구쳤다. 그런데 G 선배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없었다. 알았으면 말렸어야지 보고만 있나? 에이, 제가 그래서 손대지 말자고 했잖아요. 와, 말 겁나 싸가지 없게 하네? 싸가지 없는 게 아니라, 하지만 그는 단박에 내 말을 끊었다. 니 내가 우습나?


   아마 그때, 내 머릿속에서도 불꽃이 튀었을 것이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끊어졌을 것이다. 아- 시발. 방금 뭐랬는데? 욕했는데요. 니 나랑 몇 살 차이 나는지 아나? 알면 좀 형처럼 구세요. 뭐? 형이 잘못해놓고 왜 남 탓 하는데요, 왜요, 회사에서 뭐라 할까 봐 쫄았어요? 이 새끼가! 아니 뭐, 제가 틀린 말 했어요?


   *


   그 후로도 비는 한참을 더 내렸다. 지면을 때리는 소리가 격해지고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G 선배와 내가 뱉은 욕지거리도 온 기숙사를 시끄럽게 울렸다. 정전과 고함에 놀란 다른 방 친구들이 말리러 나올 때까지. 아마 각자 방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 소리는 저마다 주먹을 쥐고 마음의 어딘가를 끊임없이 두드렸을 것이다.


   처음에는 화해할 생각도 있었다. G 선배와 다시 잘 지내고 싶다기보다는,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과 언짢은 관계가 되는 게 피곤해서였다. 하지만 얼마 뒤 그가 회사에서 나에 대한 험담을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는 가능성을 완전히 접었다. 겨우 생각해낸 게 그런 거라니. 시시한 정치질로 사람을 주무르려는 발상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 어디 떠들고 싶은 만큼 떠들어봐라.


   독하게 마음먹긴 했지만, 어디선가 돌고 있을 소문을 상상하는 건 공장을 가득 채운 습한 열기보다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니 G랑 싸웠나? 누군가 넌지시 물어올 때면 가슴이 덜컥하고는 했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와전되었을지, 나에 대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이 더해졌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기가 생겼다. 나는 G 선배를 정말 깔끔하게 무시했는데, 그가 어떤 말을 하고 다니던 기죽지 않기로 했다. 업무는 확실하게 처리했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예의 바르고 솔직하게 행동했다. 불편한 질문들에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웃어넘겼다. 그런 뻔뻔함에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


   시간이 지나면서 더위는 점점 물러갔다.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질척거리던 시간도 새로운 날들로 환기됐다. 별말 없이 묵묵히 일 잘하던 내 평판은 여전히 좋았고, G 선배가 내는 소문은 뒤끝 있는 옛날이야기 취급을 받았다. 높이 열려있는 파란 하늘을 보며 나는 직감했다. 장마가 끝났다. 답답한 먹구름도, 짜증스러운 습기도 어느새 계절의 뒤편으로 멀어졌다.


   기숙사에서 맥주를 마시며 친구들은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 그 형은 너 아니었으면 평생 버릇 못 고쳤을걸? 반장님이 G 선배한데 그만 좀 해라고 하는데, 내 속이 다 후련하더라. 그들은 지금까지의 스트레스를 분출하듯 나의 용기와 끈기를 칭찬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뿌듯함보다는 다소 허탈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기숙사 보수 공사는 여전히 미뤄졌고, 안 그래도 쉽게 지치는 여름 동안 모두가 이득 없는 싸움에 휘말려 심리적인 피로감을 느껴야 했다. 도대체 왜 그래야 했던 걸까? 내가 고집을 꺾었다면, 먼저 사과했다면 괜찮았을까? 하지만 그랬다면 G 선배는 나를 만만하게 여기고, 자신의 승리에 도취해 금방 또 다른 누군가를 괴롭혔을 것이다.


   ‘얘들아, 너무 착해도 이 나라에서 살기 힘들다. 적당히 싸가지도 부리고 개기기도 해야지 묵묵하게 일만 하면 호구로 보고 갈구기만 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때리거나 건드리면 너는 더 때려라. 이게 팩트다. 약한 모습 보이지 말고. 세상이 그래. 더 강해져라.’


   문득 그 말이 떠올라 나는 맥주를 마시던 손을 멈췄다. 2014년, 현장실습생 자살 사건을 다룬 기사에 달린 댓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자신에게 되묻고는 했다. 강해진다는 건 싸가지를 부리는 걸까. 자신이 상처 입지 않기 위해 남을 더 상처 입히는 사람이 되는 걸까. 강해진다는 건, 겨우 그런 걸까.


   쏟아지는 감정에 못 이겨 잠시 눈을 감았다. 하늘은 맑은데 자꾸만 무언가 마음을 두드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하늘은 여전히 비가 올 텐데, 끝나지 않는 장마가 올 텐데. 고함. 소문. 답답한 공기와 질척거리는 시간을 혼자서 견뎌야 했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다. 강해질 필요 없다고.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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