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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 Sep 24. 2020

세 번째 시험을 앞두고, 외할머니의 투병 소식을 들었다

할머니는 사랑 그 자체였어요. 할머니처럼 사랑 많은 사람이 될게요

   공부만 몇 년을 하다 보면 큰 욕심이 없어지게 된다. '무엇을 갖고 싶다', '어딜 가고 싶다'라는 생각은 이미 저버린 지 오래고, 단순히 내가 공부하는 동안만큼이라도 내가 내 몫을 다하게 될 때까지 부모님과 할머니, 할아버지가 건강하셨으면 하는 기도 밖에 나오질 않는다.      


   얼마 전 외할머니의 기일이었다.      


   큰 거 바라는 거 없다고, 내가 붙고 효도할 수 있도록 건강하게 오래오래 내 옆에 계셔달라는 기도 밖에, 그런 바람뿐이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였다. 2017년, 세 번째 시험을 앞둔 어느 날,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았다. 외할머니의 투병 소식이었다. 가장 징후가 없고, 늦게 발견되는 만큼 이미 손 쓸 새 없이 퍼져버린 췌장의 암세포는 내 기도의 뿌리마저 흔들었다. 특별히 바라는 것 없었고, 딱 하나. 붙고 나서 효도하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산산이 조각났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좌절하고, 할머니가 보고 싶어도 마음 편하게 서울에 올라가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했다. 


   엄마가 우는 만큼 나도 함께 울었다. 공부하려고 책을 보면 외할머니 웃음소리와 부드러운 서울말이 들렸다. 교회에 괜찮은 청년이 있다며, 소개시켜 주겠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시던 마지막 통화 내용도 떠올랐다. 교회에 살다시피 계시면서 새벽부터 가족을 위해, 나를 위해 해주시는 기도가 떠올랐다. 그렇게 한평생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하셨던 할머니가 너무 안쓰러워 눈물이 났고, 내가 아무것도 해드린 것이 없다는 게 너무 슬퍼 눈물이 났다. 


   나에게 외할머니는 그런 존재였다. 내가 잘될 수밖에 없는 이유. 내가 공부를 하다가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지더라도 다시 올라갈 수 있는 이유였다. 매일 해주시는 기도면 나는 언제가 되더라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었다. 웃으면서 ‘할머니 기도 빨로 될 거에요! 내 기도는 안 들어주셔도 우리 할머니 기도는 들어주시겠죠’라고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 할머니가 아프시다는 소식은 공부도, 나의 신앙도 모조리 흔들리기에 충분했다. 철들고 처음으로 누군가의 부재를 겪는 사실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힘들었다. 믿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연히 공부가 되질 않았고, 도서관에서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곤 했다. 더 이상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없어 하루빨리 할머니를 보기 위해 대학 졸업을 앞둔 동생과 함께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머리카락이 빠지실 할머니에게 드릴 예쁜 모자를 정성껏 골랐다. 내가 할머니께 해드릴 수 있는 건 이 모자가 전부였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에게 남은 시간은 한 달뿐이라는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사망선고가 할머니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 몰랐고, 두려웠다. 그랬기에 할머니는 뭐하러 왔냐며, 공부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웃으며 반겨주셨다. 언제고 퇴원할 수 있다고 확신하신 할머니는 그 누구보다 밥도, 약도 잘 드셨다.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이틀을 할머니 옆에 머물며 할머니를 지켰다. 공부보다는 할머니와의 시간이 더 중요했다. 할머니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할머니의 과거 모습까지 기억하는 것만이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전부였다. 


   고작. 한 달이었다. 나의 중심이었던 아름답고도 멋스러운 꽃이 지기에는 너무 빠른 시간이었다. 삼촌의 전화에 엄마와 동생이 먼저 할머니를 뵈러 갔고, 나는 아버지와 다음날에 출발하기로 되어있었다. 출발 직전, 할머니의 임종 소식을 들었다. 


   “하나님. 나. 포기 포기.”


   할머니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셨다. 할머니다운 마지막 말씀이었다. 버티고 버티다 아들, 딸들 보시고 그렇게 눈을 감으셨다.     

 

   할머니의 장례식날. 교회의 귀여운 오지라퍼 권사님이셨던 만큼 많은 분이 할머니를 배웅해주셨다. 그 가운데 한 가족이 있었다. 이모도, 엄마도, 삼촌도, 할아버지도 모르는 분이라 대접을 하질 못하다 엄마가 뒤늦게 대화를 나누셨다. 할머니가 다니시던 교회에서 지휘자로 계셨던 분이셨다고 했다.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라 아는 분들도 없는데, 외할머니가 늘 챙겨주셨다고 감사해서 부고 소식에 멀리서 찾아오셨다고 했다. 같은 아파트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 아이에게 일요일마다 이천 원을 주시며 교회로 데려가 친구를 만들어주신 분이셨다. 할머니가 병원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 아이를 제일 먼저 걱정하는 분이셨다. 우리 할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사랑 그 자체였다. 늘 사랑이 넘치는 사람. 힘이 없는 사람들, 약자에게 먼저 손 내미셨던 분이였다.


   외할머니와의 이별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할머니의 마지막을 통해서 적어도 다시 한번 할머니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적어도 내가 선생님이 된다면, 그런 선생님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아이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 설사 그럴 수 없다 하더라도 늘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큰 업적을 남기고 훌륭한 사람이 아닌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나’이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할머니는 사랑 그 자체였어요. 할머니처럼 사랑 많은 사람이 될게요. 할머니의 기도 덕분에 이 자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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